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절강성의 성도 항주(杭州)에 있는 절강대학은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 직속이다. 줄여서 ‘절대(浙大)’라고 부른다. 전신은 1897년에 창립된 구시서원(求是書院)이다. 이 서원은 중국근대사상 서양의 학제를 모방한 최초의 신식고등교육기관 가운데 하나로 항주시 상성구 포장항(蒲場巷)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이 자리에는 남송 소흥연간에 지은 보자사(普慈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명대에 훼손된 것을 청의 광서연간(1889~1891)에 중건했다. 광서23년(1897), 항주지부 임계(林啓)가 사찰을 절강성 최초의 신식고등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 1928년 7월에 국립절강대학으로 개칭하고, 문리(文理), 공(工), 농(農) 등 3개 학원을 산하에 설치했다. 서원의 옛터에는 보자사 대전이 남아 있는데 절강성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에서 서원을 거쳐 중국의 5대 명문대학으로 성장한 이 대학은 유명한 영국의 중국학자 조지프 니덤은 ‘동방의 캠 브리지’라고 불렀다.

절강대학은 근학(勤學), 수덕(修德), 명변(明辯), 독실(篤實)을 공동가치관으로 삼고, 바다가 온갖 물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두터운 덕을 쌓는 것을 정신으로 여긴다. 5월 말, 벗들과 항주, 소주, 소흥을 여행했다. 항주가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자랑하는 장예모(張藝謀)가 만든 인상서호(印象西湖)를 관람했지만, 나에게는 저녁 무렵에 둘러 본 절강대학이 더 인상에 남았다. 널찍한 캠퍼스 곳곳에는 북경, 상해, 산동, 동북의 대학에서 느끼지 못한 침묵과 절제가 있었다. 2기 집권을 노리는 시진핑의 정치적 구호는 미국과 견주는 강대한 중국이다. 중국 전역에는 조폭과의 전쟁이라는 붉은 글자가 휘날린다. 사회악을 근절하겠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이지만, 내면에 집권체제강화가 있다는 것은 외부인의 시각에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도 절강대학의 이러한 이상한 침묵과 절제는 무슨 의미일까? 고조된 감정, 추상적 관념의 강압, 합리성의 횡포, 대중민주주의의 선동, 근거가 약한 교만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러한 현실적 감각은 중앙의 시각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변방의 학분적 형태로 나타난다. 항주의 자존심은 인상서호라는 관광상품이 아니라, 조용히 숨을 고르는 절강대학의 지성이 아닐까? 모든 것을 중앙이 독점하는 우리는 절강대학의 침묵에 주목해야 한다.

절강대학의 역사관은 이쭝티엔이 대표하는 중국의 일반적 역사인식은 물론, 황런위가 보여준 제3자적 시각과도 다르다. 그들의 인식 저변에는 로칼리즘(Localism)이 있다. 로칼은 글로벌이나 센터의 이해관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모두가 거대한 통일체를 형성하는 것이 안전을 담보한다고 생각하지만, 로칼리즘은 오히려 철저히 종횡으로 분할된 소규모집단체제가 공생과 다양성을 담보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춘추를 역사서가 아니라 경전으로 생각하는 유가의 핵심철학이기도 하다. 로칼은 센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센터에서 구축한 역사가 로칼의 가치를 마음대로 왜곡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북방을 포기하고 남경과 항주에 지방정권을 세운 동진과 남송을 반드시 부정적인 역사로 치부해야 하는가? 남방인은 북방을 회복하지 못한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강적에게 강경대항을 하는 것만이 정당한 태도인가? 만주족의 청에 끈질기게 저항한 남방의 전통지식인과 달리 내분의 조속한 종결과 정치적 안정을 요구한 남방불교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배신인가?

절강대학은 이러한 문제에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입을 닫지도 않는다. 침묵과 절제라는 몹시 힘든 방법으로 꾸준히 중국의 동남지역 기층의 입장을 다양하게 설명한다. 나는 그 뿌리가 중원과 산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가의 화하민족주의와 초와 오월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장의 자역주의적 로칼리즘의 길항관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중앙주의에 모두가 굴복하지만, 조용한 원심력으로 버티는 절강대학이 언젠가는 변화를 주도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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