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재단법인 선학원에 있는 만해스님(한용운, 1879~1944) 동상. ⓒ천지일보 2019.6.5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재단법인 선학원에 있는 만해스님(한용운, 1879~1944) 동상. ⓒ천지일보 2019.6.5

선학원 창건 관여했다? 안했다?
법진, 재산환수소송판결문 제시
학계 “수감중이어서 관여 못해”
만해스님 추모 75주기 학술대회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저명한 만해스님(한용운, 1879~1944)이 재단법인 선학원 창건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재차 제기됐다. 그러나 현재 불교계와 일부 학계에서는 당시 만해스님이 선학원 창건에 관여할 수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어서 1921년 선학원 건물 공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만해스님과 선학원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이뤄졌지만, 역사적인 사실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둘의 관계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이에 선학원 이사장이자 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 법진스님은 4일 만해스님 추모 75주기를 맞아 선학원 부동산등기권리증철을 증거로 제시하며 만해스님이 선학원 창건에 관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선학원은 만해스님과 만공스님을 설립 조사로 여기고 있다.

법진스님이 증거로 제시한 1954년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2부(재판장 이성욱) 판결문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이판인 수좌스님들은 기미독립선언에 참여한 만해스님을 ‘이판계의 수장’으로 모셨고, 그의 출소를 대비해 그를 중심으로 친일 사판계에 대응하는 총본부인 선학원을 건립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법진스님은 “당시 선학원 설립에 실질적 역할을 했던 남전·도봉·석두스님은 1921년 12월 출옥한 만해스님을 선학원 설립이념과 운영의 상징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사판계는 당시 사찰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주류 불교계로 친일적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으며, 이판계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불교계 인사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계와 현재 학계는 만해스님에 대해 제대로 연구해 다시 조명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재단법인 선학원(이사장 법진스님)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만해홀에서 ‘2019년 만해 한용운 75주기 추모 학술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6.5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재단법인 선학원(이사장 법진스님)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만해홀에서 ‘2019년 만해 한용운 75주기 추모 학술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6.5

이외에도 법진스님은 만해스님과 선학원 사이에 존재했던 관계와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내용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만해홀에서 재단법인 선학원 주최로 열린 ‘2019년 만해 한용운 75주기 추모 학술회의에서 발표됐다.

한편 만해스님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부친으로부터 의인들의 기개를 전해 들으며 자랐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봉기를 목격한 후 속리사, 백담사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불교사상을 탐구했으며, 1904년 출가한 이후 변질한 한국불교의 개혁을 추진했다.

1913년 개혁방안을 제시한 지침서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행했고 난해한 불경의 연구와 주해, 승려교육을 위한 교재와 불교잡지 ‘유심(惟心)’ 간행 등을 통해 불교 근대화와 대중화에 기여했다. 또한 친일승려를 규탄하고 계몽활동을 펼치며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조국의 장래를 논의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도 노력했다.

1919년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용운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집필하고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올곧은 독립투사, 민족의 희망을 노래하다’ 한용운은 1921년 출옥한 뒤 불교혁신운동과 함께 민족운동, 물산장려운동 지원,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1931년에 잡지 ‘불교(佛敎)’를 인수해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운동을 펼쳤고, 6.10만세운동 이후 좌우합작 단체로 결성된 신간회의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한 민중대회 참여와 여성해방운동과 농민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1926년 민족의 희망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을 발간하고 시와 소설 등 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그의 민족정신을 구현했다. 이로써 만해스님은 한국문학사에서 대표적인 근대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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