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여야 싸움판을 국민이 언제까지나 지켜볼 수 없는 터에, 립 서비스만 위민(爲民)이지, 편을 갈라 국민을 이용하려드는 나쁜 정치에 맛이 든 세력들에게 매섭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당이 정치 추진체로서의 사명은 좋은 정치로 국민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일임을 깨닫게 해야 하고, 정치인의 근본이 국리민본(國利民本)에 있음을 일깨워줘야 하겠다. 국민을 핫바지로 아는 위정자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사이비 정치인들을 도태시킬 방도는 정치혁신뿐이다.… (이하생략)’

변함없이 구태를 연출해내고 있는 정치권의 작태를 지적한 이 글은 필자가 2014년 9월 29일자 본란에 쓴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나쁜 정치’의 양상들」이란 제하의 글이다. 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야가 서로 상대를 탓하며 오랫동안 국회활동을 방치하고 있는 현 정국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우리사회에서 정치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비록 더디기는 하나 발전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지만 유달리 정치만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데에는 정치인들이 제도가 주는 기득권에 갇혀 이기적 속셈에 젖어있는 탓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우리국민들이 정치권에 대해 너무 관대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지울 수가 없다.

국회가 장기간 공전된 탓으로 민생법안들이 줄줄이 묶여 국민이 힘들고 불편한 일상을 보내도 국민은 말로만 정치 불신이니 국회 무용론을 꺼내들지만 정작 국민의 힘으로 정치개혁을 보여 줘야할 시기에는 그렇지 못했다. 정치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념에 편승해 지지하다 보니 정치권은 국민의 눈치를 살필 뿐 푸대접이다. 정치인들이 기득권에 갇혀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에는 주권자로서, 유권자로서 국민은 응당 매서운 회초리를 들어야 마땅했다.

지난 5.18기념식 후 문재인 대통령이 5.18정신을 헌법 전문(前文)에 담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자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지난해 3월 대통령 발의 개헌안을 언급하며, 국회가 폐기한 정부 마련 개헌안에서는 헌법 전문에 5.18정신이 담겨져 있었지만 계승하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바 있다. 정치권에서 개헌론의 불을 다시 지폈으면 하는 기대로 보이긴 하나, 개헌에 대한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은 동조하나 한국당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지난달 15일 권력구조를 바꿀 개헌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며 개헌론에 불을 지폈는바, 제왕적 대통령제가 불러오는 비극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국회와 내각이 제 역할을 하는 ‘분권형 권력구조’을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필요하다면 권력구조 개편만을 위한 원 포인트 개헌론도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정동영 민평당 대표 역시 “정치개혁은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이을 강조하면서 연동형 선거제 개혁과 분권형 개헌을 위한 투 포인트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는 등 개헌의 당위성을 알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한국당의 셈법은 다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원포인트 개헌에 대해서는 “권력구조 개헌을 통해 사실상 의원내각제로 가자는 것이고, 결국 국가의 틀을 바꾸는 것인데 선거가 1년 남아서 실질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개헌하기에는 시간상 촉박해 어렵다는 것인바, 이로 보아 한국당에서는 개헌 논의보다 총선이 더 급하다는 전제가 된다. 제1야당에서 개헌에 대한 열의가 없는 현실에서 바른미래당과 민평당에서 권력분산형 개헌을 주장하고 이에 여당이 가세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당장 개헌 논의가 성사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21대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온 시기에 개헌에 전념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한국당의 주장은 맞다. 하지만 20대국회에서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가동해 오랫동안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연구해왔고, 정개특위에서 논의와 공청회를 거쳐 개헌의 기본 골격과 권력 구조가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다. 그런 실정에서 한국당이 시기상 촉박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꼭 본받아야 할 것은 아니겠지만 현행 헌법은 개헌론이 나온지 4개월 만에, 여야가 합의한지 2개월 만에 6공화국 헌법을 탄생시킨 사례가 있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여야가 얼마만큼 적극성을 갖고 국민과 국가를 위한 백년대계의 좋은 헌법을 만드느냐는 열의에 달린 것이다.

현행 헌법이 시행된지 31년이 됐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비현실적 내용도 있으려니와 특히 단임 5년제 권력 구조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개헌을 정치권이 유·불리를 따져서 지연시킨 것은 기득권의 고수라 아니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렇다. 과거 야당 시절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담은 헌법이라 지적하면서 그만큼 개헌을 요구했으면 다시한번 국민의 입장을 들어 국리민본(國利民本)을 위한 개헌의 길에 나서야 한다. 개헌을 통해 절대 권력을 분산시키고, 나쁜 정치를 몰아내는 정치혁신이야말로 시대적 소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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