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창씨개명(創氏改名)까지 하게 된 것이 일제 강점기가 처음이 아니다. 그보다 600년 전인 고려시대 때 이미 창씨개명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이 세운 원(元)에 굴복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고 충렬왕이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면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됐다. 이때부터 고려 왕의 묘호에 조(組)나 종(宗)을 쓰지 못하고, 왕의 시호 앞에는 충(忠)을 붙이도록 했다. 원나라에 충성하는 임금이 되라는 것이었다.

고려의 임금은 스스로를 부를 때도 짐(朕) 대신 고(孤),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도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殿下)라 했다. 황제를 부를 대 때 쓰는 만세(萬歲)도 천세(千歲)로 낮춰버렸고, 태자의 호칭도 세자가 됐다. 임금과 대신들도 앞 다퉈 몽골식 복장과 머리모양인 호복과 변발을 하고 이름까지 몽골식으로 바꿔버렸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창씨개명의 역사다.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던 몽골들에게 정신과 혼까지 털린 굴욕적인 사건이다.

1274년 원에서 매빙사를 보내 부녀자 140명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충렬왕은 결혼도감을 설치해 과부와 역적의 처, 노비의 딸 등을 뽑아 원에 보냈다. 그것이 공녀(貢女)의 시초다. 공녀란 강대국에 선물로 바치는 공물(貢物)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몽골에 굴복할 수 없다며 피로 저항한 삼별초 군인들의 아내와 딸들도 공녀로 잡혀갔다. 독립군의 가족과 자손들이 고초를 겪는 역사가 이때도 있었다.

원의 공녀 요구가 점점 심해지자 고려는 과부추녀추고별감이라는 기이한 관청을 만들어 공녀를 뽑아 바쳤다. 처녀를 시집보낼 때는 관아에 신고부터 하도록 하는 특명까지 내려졌다. 딸을 낳으면 행여 공녀로 잡혀갈까 두려워 딸 낳은 사실을 숨기는가 하면, 공녀로 뽑히자 도망을 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허다했다. 결혼하기에 턱없이 어린 나이인데도 일찍 결혼을 시켜 버리는 조혼 풍습, 데릴사위 제도도 생겨났다.

공녀 뿐 아니라 원에서 사신으로 고려에 출장 나온 인간들도 고려 여자들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이래저래 고려의 여인들이 고난을 겪고 잡혀나가면서 고려 총각들은 장가 들 짝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다. 공녀 문제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졌다. 곡하는 소리가 전국 산천에 울려 퍼졌다. 보다 못한 이곡이라는 사람이 원 황제에게 이렇게 상소문을 올렸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한곳에 모여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로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어당기다가 난간이나 길바닥에 엎어져버립니다. 비통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 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고려 공녀의 아픈 역사가 있는 몽골에서 최근 반갑지 않은 뉴스가 들려왔다. 몽골 주한 대사관에서 갑질 의혹이 일고, 공녀에 대한 역사 인식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나라를 대표해서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면 큰일이다. 무엇보다,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끼리는 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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