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유럽의 정치지형이 크게 변하고 있다. 기존의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던 이념적 스펙트럼이 퇴조하고 그 대신 극우 성향의 포퓰리즘 정당이나 이슈형 신생정당 또는 녹색당 등‘제3의 대안정당’이 크게 약진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동안 유럽정치를 주도했던 전통적인 기득권 양당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23일부터 26일까지 28개 회원국에서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 선거가 있었다. 선거 결과는 각 나라마다 독특하고 다양한 정당체제로 나타났지만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기득권 양당체제가 크게 세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전체 751석 가운데 제1당인 중도우파 성향의 유럽국민당(EPP)과 제2당인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진보동맹(S&D)이 과반 의석 확보 실패한 것이다. 이로써 직선제로 바뀐 지난 1979년 이후 유럽의회를 지배했던 두 그룹의 연정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물론 비슷한 성향의 중도세력을 더 포함시켜서 유럽의회를 다시 주도할 수 있겠지만 유럽정치의 근본적 재편을 바라는 각 회원국들의 민심을 외면키는 어렵게 됐다. 유럽정치의 이러한 경향은 이번 유럽의회 선거뿐만 아니라 이미 10여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형성돼 왔던 정치지형 변화의 거대한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그 하나의 상징적 지표를 보여준 셈이다.

영국 기득권 양당체제의 위기

의원내각제 국가로서 양당체제의 대표적인 모델은 영국이다.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기존의 토리당과 휘그당이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재편되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서는 보수당과 노동당 양당체제로 구축되면서 근대 정당체제의 발전 모델이 되었다. 따라서 영국의 양당체제는 그 역사만큼이나 깊고 오랫동안 영국 유권자들에게 각인돼 왔다.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당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인물과 정책의 혁신을 통해 재신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뿌리 깊은 양당체제의 힘이었다. 주변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오스트리아 등에서 양당체제가 뿌리부터 흔들릴 때도 영국만큼은 양당체제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양당체제도 이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집권 영국 보수당은 한 자릿수 득표율로 전체 5위에 머물렀다. 물론 ‘무능 총리’의 대명사가 될 듯한 메이(Theresa May) 총리가 다음 달 7일 당대표를 사퇴하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영국 보수당 역사에서 이런 참패는 없었다. 그리고 영원한 라이벌이 될 것 같았던 제1야당 노동당도 14% 정도의 득표율로 3위에 그쳤다.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노동당과 집권 보수당, 두 거대 정당의 참패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자리에는 ‘브렉시트당(Brexit Party)’이 30%가 넘는 득표율로 돌풍을 일으키며 1위에 올랐다. 브렉시트당은 브렉시트 찬성 캠페인을 주도했던 극우 성향의 패라지(Nigel Farage) 전 영국독립당(UKIP) 대표 등이 주축이 돼 지난 2월 창당한 신당이다. 창당 3개월 만에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정당이 된 셈이다. 그리고 보수당과 노동당에 밀려 만년 3위 수준에 머물렀던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s)은 두 거대 정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영국정치의 지형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브렉시트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에 들어갈 때부터 영국정치는 이미 지각변동을 예고해 놓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집권 보수당의 비전과 전략은 초라했으며 그마저도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그 결과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주인공인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는 사퇴해 버렸고, 그 뒤를 이은 메이 총리는 임기 내내 좌충우돌을 반복하다가 결국 사퇴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제1야당 노동당이 리더십을 발휘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치공세만 앞세웠지 무엇 하나 제대로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안해하는 국민을 설득시킬 대안제시에도 실패했다. 그 사이 영국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불만과 불신이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득권 양당체제의 몰락으로 나타난 셈이다.

보수당과 노동당은 지금 이 시간에도 브렉시트 문제를 놓고 양 극단으로 달리고 있다. 마치 치킨게임을 보듯 타협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핵심은 메이 총리 이후의 리더십 문제이다. 집권 보수당은 점점 더 분열되고 있으며 노동당은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영국정치의 새로운 지형을 열어갈 새로운 리더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불가피하게 조기 총선으로 가겠지만 영국정치의 위기국면은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이미 시작된 기득권 양당체제의 종말이 이젠 막바지로 영국에서도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비록 유럽의회 선거였지만 낡고 병든 기득권 양당체제로는 더 이상의 비전도, 문제해결 능력도 없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기득권 양당체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시대 변화에 맞게 자신을 더 혁신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기득권 양당체제를 끝까지 사수하려 할 것인가의 싸움이다. 이는 보수당과 노동당의 문제를 넘어서 영국정치의 위상과 영국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동시에 ‘제3의 대안정당’은 스스로를 또 어떻게 단련시키며 리더십을 세워 나갈지 영국의 미래를 건 진짜 싸움이 서서히 불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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