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인 지하철. 그 노선을 따라가 보면 곳곳에 역사가 숨어있다.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주위에 퍼져있고, 한양의 시장 모습은 종로를 거닐며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지하철역은 역사의 교차로가 되고, 깊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와 관련, 켜켜이 쌓여있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지하철 노선별로 떠나볼 수 있도록 역사 여행지를 내·외국인에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봄옷 입은 N서울타워 ⓒ천지일보DB
봄옷 입은 N서울타워. ⓒ천지일보DB

한양 천도 후 남산이라 불려
산 올라 풍수지리도 살펴봐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지는 어디일까. 바로 ‘남산’이다.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인 남산은 그리 높지 않고 교통편도 좋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국내를 찾는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코스로도 꼽히는 장소다.

◆풍수적 기운 감싸주는 남산

남산은 서울 중구와 용산구를 걸쳐있는 해발 270.85m의 산이다. 퇴계로 3가, 예장동, 장충공원 등 다양한 길로 오를 수 있으며, 이 가운데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출발해 케이블카 승강장을 이용하면 N서울타워 아래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나무 계단을 오르면 금방 정상이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이었다. 이후 태조가 도읍을 개성에서 서울로 옮기면서 남쪽에 있는 산이라하여 남산이라고 지칭됐다. 여러 이름을 가진 남산을 뱃사람들은 ‘마뫼’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마’는 ‘마파람(南風)’의 ‘마’처럼 남쪽을 뜻하니 ‘마뫼’는 ‘남산’의 순우리말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서울을 도읍으로 고른 무학대사를 모신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봄, 가을에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일제강점기에 헐린 뒤로 인왕산 기슭의 무악동으로 옮겼다. 선조들은 남산을 장 안에 좋은 풍수적 기운을 감싸 안아 주는 고마운 산으로 여겨 이곳에 무덤을 쓰지 않았다.

남산 팔각정 ⓒ천지일보DB
남산 팔각정. ⓒ천지일보DB

◆남산 팔각정과 봉수대

조선실록에 보면 세종대왕은 남산에 올라 풍수지리를 살폈다고 기록돼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약 120년 전까지 봉수를 사용했다. 봉수는 낮에 연기를 이용하고 밤에 불빛을 이용하는 것으로 먼 곳까지 정보를 전달하는 용도였다.

과거에는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35군데 있었다. 이곳에서 시작된 불빛이나 연기 신호는 인근 봉수대에 차례대로 전달돼서 소식을 알렸다. 평소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고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남산 봉수대는 1423년(세종 5)에 설치돼 1895년까지 500년간 존속했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했다.

남산 팔각정도 자리 잡고 있다. 정상에 세워진 팔각정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연초 해돋이를 보러 오는 이들은 팔각정에 서서 아침 기운을 받고 간다.

특히 남산에서 보는 야경이 일품이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올 때면 도심 곳곳에서 불빛이 켜지는 데 마치 보석이 반짝이는 것처럼 아름답다. 볼거리와 낭만이 가득해 친구, 가족, 연인 모두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장소다. 남산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게 성곽이다. 봉수대 옆으로 낮은 성곽이 이어져 있다.

남산에 남아있는 낮은 성곽ⓒ천지일보DB
남산에 남아있는 낮은 성곽. ⓒ천지일보DB

◆남산 자락에는 가난한 선비 살아

이곳은 ‘남산골샌님’이라는 말과도 연관된 곳이다. 남산 밑자락에는 예로부터 가난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 권세도 없었지만 선비의 자존심만큼은 강했기에 고지식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신발을 사서 신을 돈이 없었다. 그래서 튼튼하고 해지지 않는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걸을 때 늘 ‘딸깍딸깍’ 소리가 나서 사람들은 ‘딸깍발이’라고 조롱했다. 샌님이라는 말도 선비를 달리 뭉뚱그려 부르는 ‘생원(生員)님’을 줄여서 부른 말로, 이 또한 선비를 낮잡아서 부르는 용어다. 
 

남산에 남아있는 낮은 성곽ⓒ천지일보DB
남산에 남아있는 낮은 성곽. ⓒ천지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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