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남자의 성년의식은 관례(冠禮)라고 했다. 댕기머리를 올려 상투를 하고 갓을 썼기 때문이다. 여자의 성년의식은 표현이 다르다. 비녀를 꼽았기 때문에 계례(筓禮)라고 했다. 

구한말 화가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의 서당 풍속도를 보면 훈장 앞에서 공부하는 학동들 사이에 정자관을 썼거나 상투를 튼 소년들이 보이는데 이는 관례를 치렀음을 알려준다. 

궁중에서 임금의 대통을 이어받아야 할 세자들은 어린 나이에 관례를 치르고 장가를 가야했다. 갑자기 임금이 승하하면 어린아이가 등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운의 임금 단종은 12세에 아버지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대통을 잇기 위해 이 시기에 서둘러 관례를 치렀다.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된 단종은 결국 잔인한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7세 나이에 강원도 영월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정조도 일찍 관례를 치렀다. 세손 시절인 9세 되던 해 치렀으니 가장 어린 나이에 성인이 된 셈이다. 이때 형운(亨運)이란 자(字)를 받았으며 대제학 김택영이 반교문을 낭독했다. ‘나라의 맏손자로서 대통을 이을 사람임을 명심하고, 요, 순과 같은 임금이 되시라’는 당부였다. 정조는 10세에 경기관찰사 김시묵(金時默)의 동갑내기 딸에게 장가들었다. 

옛날에는 관례를 혼례(婚禮)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고전 춘향전를 보면 밤중에 담장을 넘어 온 남원부사 아들 이도령에게 딸을 빼앗긴 월매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빠졌다. 곱게 길러온 딸에게 계례를 시켜 좋은 혼처를 만들어 주지 못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이도령과 술상을 마주하면서 절대 배신하지 말고 백년해로 할 것을 강요까지 했다. 이도령은 서약서 이상의 다짐을 한 후에야 비로소 춘향 방을 자유스럽게 넘나들 수 있었다.   

조선 풍속지를 보면 관례의식이 매우 까다로웠다. 우선 음력 정월 중 길일을 잡는다. 당사자는 3일 전에 사당을 찾아가 술과 과일을 준비해 관례가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친구 중에서 덕망이 있는 자를 골라 빈(賓)이 되기를 청했다. 그리고 관례 전날 밤 ‘빈’을 자신의 집에서 유숙하게 했다. 

당일 날은 하객들이 모여 3가지 관건(冠巾)을 차례로 씌우는 초가(初加)·재가(再加)·삼가(三加)의 순서를 진행한다. 초례를 행한 뒤 빈이 자(字)를 지어 주는 것이다. 의식이 끝나면 주례가 관자를 데리고 조상의 위패 앞에 절을 한 다음 부모와 존장(尊長)에게 인사를 하고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관례일 받는 ‘자’는 부명(副名)으로 이름 쓰기를 꺼려한 데서 생긴 것이다. 동년배나 친구사이에는 편지를 주고받을 때 끝 부분에 ‘자’를 썼다.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명현 조광조는 자가 효직(孝直)이었다. 그가 남긴 친필 간찰을 보면 이름 보다는 ‘효직’이란 자를 사용한 것이 많다. 

오늘이 바로 성년의 날, 전국에서 전통 관례행사가 풍성하게 열렸다. 경상대학교 한문학과는 1990년부터 30년간 해마다 전통 관례를 시연해 왔다고 한다. 성년을 맞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덕담을 해줘야 할까. 성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은 숱한 경쟁에 직면하며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지금 한국사회가 직면한 과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젊은 세대의 취업난이다. 좌절과 침체의 늪인 ‘헬 조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인생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큰 뜻을 갖고 노력하는 것만이 성공적 인생을 사는 길이다. 성년을 맞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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