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항쟁] 민주화 외치며 신군부에 저항… 피로 물든 광주
[5.18민주항쟁] 민주화 외치며 신군부에 저항… 피로 물든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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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 이 사진은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다. (출처: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 이 사진은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다. (출처: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계엄군 발포에 무장으로 맞서

끝나지 않은 광주민주화운동史

[천지일보=이대경 기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매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추모 행사에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중 일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광역시에서 군부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올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과 진상규명의 역사를 알아봤다.

◆신군부 정권장악과 계엄군 광주진입

1979년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를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1980년 4월 이후 신군부를 의식한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과 사북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됐다. 거기에 국회에서는 5월 20일자로 비상계엄 해제 논의를 위한 본회의 개최를 결정했다. 위기를 느낀 신군부의 전두환, 노태우 등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강행하기 전 군부대를 대구·부산·광주 등지로 사전 이동시켜 시위 진압 준비를 마쳤다. 이들은 비상 국무회의를 열고 19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했다.

비상계엄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돼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등에 진주했다.

5.18 당시 계엄군의 시위 진압 장면. (출처:5.18기념재단 홈페이지)
5.18 당시 계엄군의 시위 진압 장면. (출처:5.18기념재단 홈페이지)

◆계엄군 폭력에 피로 얼룩진 광주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에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100여명의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교문 앞으로 모였지만, 계엄군에 의해 진입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광주 각지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학생들의 시위는 계엄군이 투입될 정도로 위력적인 시위는 아니었다.

이날 오후 3시 40분께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광주 유동 삼거리에 도착했다. 공수부대에 체포명령이 하달되자 계엄군은 금남로와 충장로를 중심으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광주시민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진압과정 중 농아 김경철씨가 계엄군에 의해 사망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최초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계엄군은 김씨가 질문에 대답을 안 한다는 이유로 무차별 구타를 가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날 공식적으로 보고된 연행자는 405명이었다.

5월 20일 광주시민들의 시위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신군부는 계엄군을 더 투입했다. 광주시 운전기사들은 이날 오후 5시 30분께 각자의 대형버스와 택시를 이끌고 무등경기장에 집결한 후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이동했다.

5월 21일 오전 11시 최소 10만에서 최대 30만에 달하는 광주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 시위를 진행했다. 오후 1시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를 때 계엄군은 공포탄을 쐈다. 이후 실탄 사격이 시작됐고 21일에 발생한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4여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다쳤다. 이날 사망자 중에는 임신 8개월의 임신부도 있었다.

도청 앞 집단발포로 인해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 시민들은 광주 외곽,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 지역으로 진출해 경찰서와 무기고를 점거하고 무장했다.

22일~27일까지 ‘해방 광주’라고 불리는 시기에 시민군의 조직화가 이뤄지고 수습위원회가 조직됐다. 23일 계엄군에 대한 8개항 요구 조건에 대해 무기 반납에 대한 이견을 제외하고는 시민군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합의가 이뤄졌다. 5명의 시민군대표가 계엄군과 협상을 위해 회수된 무기 일부를 가지고 계엄사령관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계엄군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본격적인 진압 작전을 앞둔 26일 광주시민군 측은 기자회견을 열고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을 통해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며 계엄군에 맞서 싸울 것을 천명했다.

계엄군은 26일 밤 12시부터 광주 시내의 시외전화선을 차단하고 ‘상무충정작전’이란 명칭의 진압작전에 돌입, 시민군과 교전을 펼쳤다. 시민군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진압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최대 전환점이 된 운전기사들의 시위. (출처: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광주민주화운동의 최대 전환점이 된 운전기사들의 시위. (출처: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헬기사격 여부, 북한군개입설 끝나지 않은 진상규명

광주민주화운동 시기에 사망자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당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인원이 많았고 공수부대원들이 사상자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망자가 나오는 대로 트럭에 싣고 암매장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에서는 5월 투쟁이라는 5.18 관련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1981년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반미운동도 시작됐다.

1987년 6월 전국에서 6월 항쟁이 일어나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가 이뤄지게 된다. 6월 항쟁 후 5.18 관련단체들은 진상규명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95년 12월 19일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시작됐다. 이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이 구속됐다.

1994년부터는 묘지 성역화 작업이 이뤄져 망월동 구묘지 옆에 신묘역이 1997년 완공됐다. 1997년도에 들어 5월 18일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됐다. 2002년에는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5.18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또 신묘역은 국립 5.18 민주묘지로 승격됐다.

지난 1990년부터 2006년까지는 5차에 걸쳐서 5.18 피해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상이 이뤄졌다.

5.18 민주화운동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피해 보상, 기념사업 등 5대 과제를 어느 정도 완수했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성격과 관련해 명백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의견과 폭동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일부 극우세력은 북한군개입설을 주장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여부에 대해선 법정에서 진실공방이 오가고 있다. 전두환씨는 지난 13일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열린 사자명예훼손 사건 2차 공판에 참석했다. 그는 여전히 헬기사격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집단발포 명령권자와 책임 소재, 과잉진압 여부 등이 밝혀지지 않은 광주민주화운동은 3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리되지 못하고 현재진행형이다.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29구의 장례식. (출처: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29구의 장례식. (출처: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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