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유명한 소설이 영화화 또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상영되기도 하지만 원작처럼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소설 속 배경이나 방대한 량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펄벅의 작품 ‘대지’나 톨스토이의 ‘부활’같은 명작을 영화로 만들어낸다고 할 경우 시청자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에서는 한계가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명작 소설들이 영화로 제작돼 관객의 호감을 받은 작품도 한두 편이 아닌 것이다.

오래된 소설 작품이지만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1933∼2018)가 쓴 ‘미국의 목가’가 영화화 된 ‘아메리칸 패스토널’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두고 또 다른 시각을 빚게 한다. 소설 속 내용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결코 평범할 수가 없는 가족들의 특수한 관계가 얽혀진 것으로 이 소설을 읽고 또 영화를 본다면, 세상에서 자식을 평범하게 키우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내용인데, 가정의 달인 5월에 와 닿는 느낌이 다르다.

필립 로스는 유태계로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태어나 그곳에 오랫동안 살면서 그 지역을 배경으로 자전적 요소가 강한 글을 써왔다. 이 작가가 미국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미국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이 수상한데 있으니 스물여섯에 등단작인 <굿바이, 콜럼버스>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이후 1998년 대표작인 <미국의 목가>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가 쓴 400편이 넘는 작품은 각종 상을 휩쓸게 만들었다. 특히 펜/포크너상을 유일하게 세번 수상하는 등 뛰어난 작품 활동으로 미국 현대소설의 아이콘이라 부를 만큼 유명세를 떨친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걸작 가운데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만도 4개이며, 그 중 하나가 1997년 작 <미국의 목가>이다. 이 소설은 그 당시 미국사회의 혼돈상을 그린 작품이다. 얼마 전 국내방송에서 다시 보는 명화에 재방됐는바 필자는 눈 여겨 봤다. 부부와 딸로 엮여지는 ‘가족’이라는 끈끈한 관계가 당사자들의 영혼을 쥐고 흔들 만큼 운명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 느껴지는 게 많았다. 소설속 내용이고 영화 이야기지만 그 내용들이 두고두고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족이라는 것이 단순관계가 아닌 그야말로 운명의 통속이다. 부모님이 우리를 애지중지 키웠듯이 우리세대 또한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자식들은 또 후손을 위해 헌신하는 게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 사회세태에서는 청춘 남녀가 혼기를 넘겨도 결혼하기가 어렵고, 막상 결혼해서도 자녀 갖기를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육아와 아동기를 지나 성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힘든 사회적 요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교육시키기가 경제적으로도 얼마나 힘든 세상인지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영화 속 주인공인 유대계 미국인 스위드 레보브는 아버지의 장갑 공장을 물려받은 갑부이다. 그는 고교시절 지역 스포츠계의 스타이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젊음의 우상으로 성장했고, 또 미스 뉴저지 출신인 미인, 던과 결혼하게 된다.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성공인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 행복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양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민이 있다. 사랑하는 딸 메리가 말을 더듬는데 이것은 아이가 미모의 엄마와 거부(巨富)의 아빠에 대한 회피 증세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러한 메리가 사춘기를 맞으면서 영화 속 당시의 베트남 전쟁과 반정부 운동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상한 성격으로 변해가기 때문에 부모들은 더욱 걱정이 컸다. 급기야 열여섯 난 메리가 반정부운동을 하면서 부모 몰래 폭발물을 제조하고선 마을 우체국을 폭발시키는 등 테러 살인사건에 휘말려 도주한 이후 스위드 레보브의 행복과 아름답기만 했던 순간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도망 다니는 딸을 찾아 헤매는 동안 우울증을 앓던 아내 던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으니 설상가상이다. 자신의 남은 인생을 내던지고 딸을 찾기 위해 모두를 쏟아 붓는 스위드는 딸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고 행방을 쫓는다. 마침내 오물이 뒤덮인 한 폐허에서 믿을 수 없는 모습의 메리를 찾았지만 그 아이는 피신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아버지에게 이제는 딸을 잊어달라고 애원해 결국 돌아서고 만다. 그 후 딸애를 그리워하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데 가족을 지키려는 부성애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부모에게서 ‘애물단지’라는 말이 있듯 소설 <미국의 목가> 이야기가 그러한데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한 내용들도 많다. 얼마 전 문 대통령의 딸이 해외에 이주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정치권에서도 논란거리가 됐던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간 자식을 둔 부모 가슴에는 운명과 같은 자식의 그림자가 새겨져 있으니 그 그림자 상흔을 끄집어 낼 일은 아니다. 미국 대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 속에서 ‘자식을 평범하게 키우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내용은 현실에서도 꼭 들어맞는 말이니 이는 운명의 영원한 숙제풀기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