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의 삶 “농민 소리 들어보소”
‘들풀’의 삶 “농민 소리 들어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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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일 전국농민대회에서 만난 김덕윤 경남고성군여성농님회 회장이 쌀 농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폭염·폭우에 ‘설상가상’ 한미 FTA까지
농가들, 쌀농사 짓기 점점 힘들어져

농가 “물가 오르는데 쌀은 20년 전 가격”
땅 묵힐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농사

[천지일보=백하나 기자] 농민들에게 올해는 무섭도록 시린 겨울이었다. 3~4월까지 눈이 내린 데 이어 여름은 유례없는 폭염이 찾아와 밭작물이 다 말라 죽었다. 등허리가 검게 타들어가도 막걸리 한 사발에 시름을 잊고 일을 해왔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수해가 났다. 구제역이 났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상 막을 길 없어, 지난 8일 한미FTA 추가협정이 막을 내린 끝에 농민들은 헐값에 들어오는 수입 쌀·돼지·소고기와 치열한 가격경쟁까지 하게 생겼다. 결국 울분이 터진 농민들은 삽자루를 내팽개치고 서울에 모여들었다.

지난 8일 ‘전국농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서울역광장에 모인 3000여 명의 농민들은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정부에 쌀 대란 대소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농민들은 ‘쌀은 평화’라는 피켓을 들고 그동안에 참았던 속내를 터트렸다.

모두 발언에 나선 이광석 전국농민총연맹 의장은 “올해 쌀 생산량은 30% 감소해 소득이 40% 줄어들었다”며 “쌀 대란 해소를 위해 공공비축미를 확충하고, 쌀소득보전직불제를 개정해 달라”고 절박한 농민의 심정을 대변했다.

▲ 시위에 볏단을 들고 나선 김인환 씨는 열심히 일해도 생산비가 안나오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시위는 발언과 구호, 볏단 태우기로 끝이 났다. 경찰과의 대치가 있었지만 큰 마찰이 없는 평화적 시위였다. 집회의 아쉬움이 남는 듯 시위가 끝난 이후에도 농민들은 광장 한 곳에서 담배를 뿜으며 서로의 시름을 나눴다.

대부분의 대화는 치솟는 물가 걱정과 정부의 대책에 대한 꾸지람의 말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국민이 쌀을 먹어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사뭇 진지하게 얘기됐다.

전북에서 올라온 한 농민은 ‘이건 호소 차원이 아니다’란 말로 포문을 열었다.

김성운(51, 전북 완주군 봉동읍) 씨는 “쌀을 먹자고 하는 것은 농민이 호소해야 할 것도 당부해야 할 것도 아니다”라면서 “쌀 먹기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일인데 왜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한국인 체질에 쌀이 적합해 각종 질병예방에도 좋다는 점 ▲밀은 쌀과 달리 유통과정에서 약을 치는 경우가 많아 안전성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 씨의 주장에 말을 보태던 이화산(51, 전국 완주군 봉동읍) 씨는 “밀은 수입 당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적게는 27가지에서 많게는 29가지 방부제 성분의 약품 처리를 한다”면서 “햄버거·피자·빵 등을 먹으면 아토피·알레르기성 질환이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 씨는 앞선 시위의 발제문을 인용해 “‘전쟁이 나도 씨앗은 뿌려져야 하고, 사람은 먹어야 한다’며 식량은 이처럼 인간 생활에 기본이고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쌀농사 짓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는 생활을 보장하고, 국민은 쌀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삼오오 모인 농민들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아무 말 안하고 열심히 일해 줬으면 적어도 죽을 생각이 들게끔 옥죄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우리나라의 기초 안보를 보장하는 농민들을 위해서라도 쌀 대란을 해소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니 기자의 뒤편으로 지역 농민들이 에워쌌다. 기자의 뒤로 분홍색 보자기에 쓴 플래카드를 펼쳐들며 ‘할 말이 있다’ ‘이 말은 꼭 좀 실어 달라’는 농민의 외침이 절실하게 흘러나왔다.

▲ (왼쪽부터) 농민 김성운 씨는 쌀 먹기는 호소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을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수해로 소출의 30~40%가 줄었다는 만찬순 씨가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쌀 먹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화산 씨, 이말라 경남고성군두호부녀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자신을 경남 고성군 두호부녀회장이라고 소개한 이말라 씨는 “쌀 한 가마에 12만 원도 안 나온다”며 “생산비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짓고 있으니 약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입에 털어 넣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이 씨의 말에 농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짓지 않는 대로 묵히는 땅에 세금을 부과하고, 묵히다가 솎아내는 비용이 더 드니 울며 겨자 먹기로 농사를 짓고 있는 현실을 아느냐”고 소리쳤다.

쏟아지는 발언 속에 김덕윤 경남고성군여성농민회장이 끼어들며 “지금 쌀값은 20년 전 가격과 같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쌀값이 20년 전이면 유지가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공무원들에게 20년 전 월급을 주고 살라고 해보라. 못살 것이다”며 “그런데 농민은 그런 쌀농사를 지으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데 대책도 없이 농민을 옥죄고만 있다”고 울먹였다. 김 씨는 지난 8일 한미FTA비준 내용과 함께 국회의 예산안 강행처리 과정의 문제점을 짚어가며 “농민들이 무식한 것 같아도 알 건 다 안다”고 눈을 부릅떴다.

수해로 쌀이 누워 소득이 없다는 50대 노인도 아우성쳤다. 자식 대학 보내야 하는데 빚 갚기도 버겁다는 50대 어머니의 외침도 들렸다. 일부 정당을 정부를 나무라는 꾸지람도 간혹 거칠게 섞여 들어왔다.

어떤 이는 농민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빗대어 ‘들풀’로 빗대어 표현한다. 바람에 나부끼고 발로 짓밟혀도 상처 입은 채로 자라나 하얀 꽃을 틔우는 강인한 생명력이 농민에겐 있기 때문이다. 얼굴이 검게 그을려도 손발이 부르터도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농민들은 그럼에도 살아가겠다. 죽지 못해 살아가겠다. 끝으로 한 어머니가 이런 말을 남겼다.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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