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완안종망(完顔宗望 ?~1127)은 금태조 아쿠타의 차남이다. 일족인 종한(宗翰 1080~1137)과 함께 북송의 멸망을 주도했으며, 휘종과 흠종을 사로잡아 북방으로 끌고 간 중국인에게 최대의 치욕인 정강지치(靖康之恥)를 안겨주었다. 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인 호수(虎水)출신으로 여진식 이름은 알로보(斡魯補) 또는 알리불(斡離不)이다. 종망은 중국식 이름이다. 아쿠타의 정벌에 참전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종망은 거란이 세운 막강한 요의 숨통을 끊기도 했다. 거란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의 몰락은 북송의 두 황제가 보여준 작태보다 더 황당했다. 1125년, 북송과 금이 해상지맹(海上之盟)을 체결하고, 요를 협공하자, 천조제는 재빨리 하북성 장북현 서북쪽에 있는 원앙락(鴛鴦濼)이라는 사냥터로 도망쳤다. 사냥을 즐기던 그는 누군가 아들이 현명하다고 말하자, 의심이 생겨 죽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천조제는 민심을 잃었다. 종망은 포로를 심문하여 천조제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습격했으나 천조제는 음산(陰山)으로 달아났으나 도중에 사로잡혔다. 야율대석(耶律大石)과 이처온(李處溫)이 야율순(耶律淳)을 옹립하여 북요정권을 수립했지만, 내분으로 오래 가지는 못했다. 나중에 야율대석은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신비의 왕국 서요를 세웠다. 거란의 생명력도 끈질겼다고 할 수 있다. 종망은 요와 북송이라는 두 제국을 멸망시킨 셈이다.

요왕조가 소멸되자, 송은 애초의 맹약을 무시했다. 금이 약속대로 돌려준 연산지역에서 환관으로 군대를 동관(童貫)과 상승군의 우두머리 곽약사(郭藥師)가 군대를 조련하면서 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종망은 산서를 중심으로 서하를 견제하다가, 송을 정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늘 의견이 달랐던 종한도 동의했다. 송을 정벌하는 책략은 종망이 주도했다. 기세가 대단한 것 같았지만, 금군의 공격을 받은 송군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곽약사가 항복하면서 송은 사실상 전투력을 갖춘 군대가 사라졌다. 송의 허실과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곽약사가 앞잡이가 되었다. 지금의 개봉시인 송의 수도 변경을 포위하자, 흠종은 셰폐와 토지할양을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다. 종망은 망국의 두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대공을 확인받았다. 첫 번째 아내는 천조의 딸로 촉국공주 여리연(余里衍)이고, 두 번째 아내는 휘종의 딸 가운데 최고의 미녀였던 무덕제희 조복금(趙福金)이다. 딸 장(張)씨는 종망과 위후(韋后)의 시녀 장씨 사이에 태어났다. 부친 종망의 성인 완안을 버리고 모친의 성을 사용했는데, 나중에 금의 산동로 익도부 지사인 한족 장씨와 결혼했다. 완안황족의 선동방계혈통인 셈이다. 원왕조 건립 이후, 이 방계혈통의 후대는 산동 청주시 담방진(譚坊鎭) 장가양촌(張家楊村)에서 세거했다.

종망은 고집이 강했으나 치밀하고 인자했다. 불교를 신봉하던 그는 모습이 부처와 닮았다. 거칠었던 종한과 달리 부하들을 소중히 여겼다. 장사들은 그와 함께 싸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군중에서는 그를 보살태자라고 불렀다. 송에 대한 정책은 강경파인 종한, 종반(宗磐)과 달랐다. 종망은 송을 멸하고 왕조를 바꾸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휘종과 흠종을 변경에 남겨두고 계속 송의 황제노릇을 하게 하면서 사실상 금의 부속국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한족과의 화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한과 종반은 송을 멸하고 왕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휘종과 흠종을 북방으로 끌고 간 후, 장방창(張邦昌)과 유예(劉豫)라는 조씨가 아닌 위초(僞楚)와 위제(僞齊)정권을 세워 한족을 통제했다. 이후의 결과를 보면 한족은 남방으로 이동하여 남송을 세우고 끊임없이 저항했다. 남송보다는 금이 몽고에게 망한 것은 종망의 생각이 옳았을 수도 있다는 증거이다. 완안씨의 선조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신라 또는 고려인 함보였다. 그들의 후예가 청을 세우고 다시 중국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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