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현정 기자]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한반도는 신라시대에서 유일하게 여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멀지만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는 추고천황(推古天皇)의 등장을 시작으로 수차례 여왕이 역사 속에서 등장했고, 중국의 경우 단 한차례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여황제로 등극한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는 3명의 여왕이 등장하는데 신라 제27대 임금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다.

일본과 중국, 양국에 최초로 등장하는 여왕은 배경이 비슷하다. 일본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추고천황은 민달천황의 황후였고, 중국의 측천무후 또한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다. 왕위계승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과 중국은 왕의 비가 그 자리를 거머쥐면서 초대 여왕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초대 여왕인 선덕여왕은 이와 같은 수순을 밟지 않고 오로지 왕위계승의 적통자라는 의미가 더 깊게 부각된 여성으로서 왕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다. ‘성골남진’이라는 이유와 함께 당연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초대 여왕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에 남아있는 선덕여왕 관련 문화재를 통해 여왕의 시대를 알아보자.

◆ 선덕여왕릉
 

▲ 선덕여왕릉 (사진제공: 경주시청)

신라 제26대 왕인 진평왕(眞平王)은 54년간 장기집권을 끝으로 맏딸 덕만(德曼)공주에게 왕위를 계승한다. 덕만공주는 진평왕의 세 딸 중 첫 째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선왕의 승하 후 화백회의를 통해 632년 한반도 역사 중 최초의 여왕이 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여왕을 ‘어질고 현명하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호는 성조황고(聖祖皇姑)로 성스러운 황실의 여성이라는 뜻이지만 여왕의 신분이 성골로 왕위계승에 합당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년의 나이로 직위 후 16년간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은 경주 낭산(狼山, 사적 제163호)에 묻히길 소망했고, 현재 낭산 정상에 여왕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은 예부터 신성하게 여기며 성역으로 보존되어 온 낭산 정상에 있지만 그 위치를 찾아가는 길을 하늘을 가리울 만큼 자라난 소나무 때문에 꾀 험난하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신라 제18대 왕인 실성왕(實聖王)이 낭산은 왕실에 복을 주는 지역이라며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기자가 여왕 능을 찾았을 때도 하늘의 구름 한 점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뻗어 있는 소나무들이 가득해 정상까지 가는데 어둑한 여운이 가득했다.

◆ 첨성대

 

▲ 첨성대 (사진제공: 경주시청)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 중 하나다.

당시 왕들은 하늘의 뜻을 알기를 원했다. 하늘의 뜻은 국가를 다스리는데 중요한 사항 중 하나로 하늘을 관측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였다.

선덕여왕 재위 당시에 만들어진 첨성대는 기단부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정자형의 정상부를 얹은 모습인데 하늘에서 바라본 첨성대는 마치 우물과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물이 귀하던 시대에 우물형상을 하고 있는 첨성대는 신라시대의 원천이며 하늘의 뜻을 관측하는 매우 귀한 장소로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는 12단에 단 창문으로 사람이 들어가 다시 그 속에 사다리를 놓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분황사

 

 

▲ 분황사석탑 (사진제공: 경주시청)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 3년에 창건됐으며 향기로운 사찰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분황사에는 9층짜리 모전석탑(模磚石塔, 국보 제30호)이 있었으나 임란 때 소실되어 현재는 3층밖에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인 모전석탑에는 사리함과 함께 바느질용 가위, 실패, 금바늘, 구슬 등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물품들이 출토됐는데 이는 창건자인 선덕여왕의 영향이 미친 것으로 보여 진다.

◆ 황룡사

선덕여왕은 20여 개의 사찰은 지었는데 그 중 황룡사(皇龍寺)는 경주에서 가장 큰 절 이였다.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때 불교가 공인되어 국교로 지정됐다. 황룡사에는 신라삼보(新羅三寶)인 황룡사9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이 지어졌는데 높이 82m로 서라벌 어디에서도 그 장엄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신라삼보는 황룡사 장륙존상·천사옥대·황룡사9층목탑으로 신라 3대 보물이다.

 

 

 

 

▲ 황룡사지 (사진제공: 경주시청)

선덕여왕은 초대 여왕으로써 여러 반대세력과 부딪히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불심을 통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는 황룡사9층목탑을 통해서도 엿 볼 수 있는데 탑 1층은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진, 9층 예맥 등 신라 주변국을 의미한다.

목탑은 각 층별로 신라가 극복해야 할 적들을 의미하고 이를 불심으로 이겨내고자 했던 선덕여왕의 염원과 내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창건인 것으로 보인다. 목탑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절과 함께 소실됐다.

하지만 경주에 가면 현대식 황룡사9층목탑을 구경할 수 있다. 바로 경주타워다. 경주타워는 황룡사9층목탑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유리타워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가 엑스포 공원 내에 건립한 타워다.

82m 높이를 자랑해 신라시대 때 황룡사9층목탑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 사천왕사지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창건한 사천왕사는 현재 터만 남아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사적 제8호)로 문화재에 등록됐다. 절터는 선덕여왕릉 아래 낭산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승하하기 전 신하들에게 죽는 날을 알려줬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죽는 날을 미리 예언하고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낼 것을 명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낭산이 바로 자신이 말하는 곳이라고 알려준 후 실제로 예언한 그 날에 여왕은 세상을 떠났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육욕천 중 두 번째 하늘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에 위치하며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환생한 곳이기도 하다.

문무왕은 사천왕을 모시는 사천왕사를 짓게 됐다. 사천왕(四王天)은 수미산 중턱에 있는 네 명의 수호신인데 사천왕사 건립으로 자연스럽게 여왕이 묻힌 곳이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이라는 것을 후대에 증명하게 된 셈이다.

선덕여왕이 발휘한 예지력은 역사 속에서도 3가지 일화를 가지고 전달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모란꽃 일화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선덕여왕은 이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확인해 보니 정말 꽃에 향기가 나지 않았는데 여왕은 꽃에 벌과 나비가 없다는 점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또 다른 일화는 추운 겨울 영묘사에 나타난 개구리 떼를 보고 여근곡에 숨어 든 백제 병사들을 예지하고 사전에 백제군을 제압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예지했다는 것이다.

◆ 태종무열왕릉

 

 

 

 

▲ 무열왕릉 (사진제공: 경주시청)

사적 제20호인 태종무열왕릉(武烈王陵)은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능의 신원이 명확히 확인된다.

선덕여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지목되는데 이는 선덕여왕의 조카 김춘추, 훗날 신라 제29대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의 활약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이 장기집권하면서 신라의 영토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여왕의 집권 당시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으로 전쟁은 끊이질 않았다.

이 시기에 김춘추는 외교를, 장군 김유신은 전쟁을 담당하면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후 김춘추는 진골신분으로 신라 제29대 왕좌에 올라 성골만 왕위를 계승한다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는 파격적인 일이 일어남과 동시에 장군 김유신과 삼국통일을 이륙하게 된다.

◆ 김유신묘

 

 

 

 

▲ 김유신묘 (사진제공: 경주시청)

김유신묘(金庾信墓, 사적 제21호)는 매우 독특하다. 장군의 묘인지 왕릉인지를 구분 짓기 어렵다.

나라의 충신이자 삼국통일을 이륙한 신라의 장군 김유신의 묘인지, 어느 순간 나타났으나 한 번도 왕위에 올라 신라를 다스린 적 없는 흥무대왕(興武大王)의 왕릉인 것인지.

사실 김유신과 흥무대왕은 동일인물이다. 김유신묘는 문무왕 14년인 674년에 축조된 것으로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김유신의 묘에 이를 지키는 사람을 배정하고 공적비를 세워 줬다.

시간이 흘러 흥덕왕(興德王)은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고 그 후손을 왕손으로 예우했다. 또 김유신묘에는 묘를 수호하는 12지신상을 조각했는데 이는 타 묘에 비해 크기가 크고 형상이 또렷함을 보여주고 있어 왕릉에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선덕여왕은 16년간 국가를 다스렸으며 선을 베풀고 민생향상과 구율사업을 통해 어질고 현명한 왕의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여왕은 직위 전 반대세력이 일으킨 ‘칠숙의난’과 승하 전 ‘비담의난’을 지켜봐야 했다. 반대세력의 난은 여성이 왕으로 군림한다는 것이 당시에도 파격적인 일이 였다는 것을 보여준 현실이다.

여성이라는 처지는 약점과도 같았지만 여왕은 김유신, 김춘추 등 인제를 등용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국가의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성골엔 남자가 없는 상황 속에서 선왕의 장기집권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왕권.

그 가운데 성골이지만 여성이라는 약점을 끌어안고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자신의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초대 여왕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시대 유일하게 여왕이 옹립되는 것을 보았을 때 어쩌면 신라인들의 진취적인 사고방식이야 말로 여왕의 시대를 열어 준 열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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