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129주년 노동절을 맞아 노동절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노동절은 미국 노동자들이 133년 전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다가 국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 당시 8시간 노동제는 혁신적인 주장이었던 만큼 자본과 권력에 충격을 줬다. 권력은 야수적인 탄압으로 대응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1800년대 노동 조건은 최악이었다. 초 장시간 노동, 저임금 체제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시카고에서는 시카고노동조합연합회가 중심이 돼 1886년 5월 1일 8만명이 거리시위를 벌였다. 8시간 노동제가 핵심 요구였다. 전국적으로 34만명이 시가행진에 참여했고 19만명이 파업투쟁에 나섰다.

5월 3일 무장경찰은 시카고 인근 농기계 공장에서 파업 중인 4명의 노동자를 살해하고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다음 날 노동자들은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항의집회를 하고 있었다.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서는 순간 폭탄이 터졌다.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경찰은 증거도 없이 노동운동지도자 8명을 체포했다. 폭탄 관련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급진 사상을 이유로 재판에 넘겼다. 재판은 신속히 진행되었고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1명은 사형 집행 하루 전날 자결하고 4명은 교수형이 집행됐다. 2명은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7년이 지난 시점에야 ‘폭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다. 8명 모두 무죄였다. 현재 헤이마켓 현장은 사적지로 지정돼 있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들 무덤에는 순교자 기념물이 설치돼 있다.

1889년 7월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노동자국제연대조직인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가 열렸다. 미국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리고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했다. 이날 제2인터내셔널은 “기계를 멈추자”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을 조직하자”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 노동자 권리 쟁취를 위해 동맹파업을 실행하자”는 세 가지를 결의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노동절 기념행사는 1923년 5월 1일 열렸다. 동아일보는 “이날 노동기념일을 당하여 조선노동총연맹회에서는 「메이데이」 기념강연회를 경성부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약 20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개최하다. 동 연맹회에서는 이날 대대적인 시위행렬을 벌릴 예정이었으나 경찰에 의하여 금지당한 바 있다”고 썼다. 같은 신문 다른 기사에는 참석 예정인원이 10000명이라고 밝혔다.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의 억압으로 인해 공개적인 행사는 쉽지 않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끊임없이 메이데이의 생명력을 살려나가려고 노력했다. 1932년 5월 1일자 기록을 보면 ‘김정옥·오기천 등 5명, 평남 진남포, 메이데이 격문 살포 혐의로 체포’라고 쓰여 있다.

해방이 되자 전평이라 불린 전국노동조합평의회가 조직됐고 해방 후 첫 노동절엔 전평이 주도해 행사를 규모 있게 개최했다. 무려 20만명이 모였다. 미군정은 전평을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노동절 행사는 제대로 치뤄지지 못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을 뒷받침하는 어용노동단체인 대한노총이 행사를 독점했다. 1957년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하라”는 지침을 대한노총에게 주었다. 대한노총은 자신의 창립일을 노동절로 만들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공산진영에서 이 날을 정치적으로 역이용 한다”면서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꾸어 버렸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 명칭과 날짜에도 이념이라는 색깔을 씌워 정권유지에 이용했다.

세계 노동절 100주년을 맞은 1989년 5월 1일 한국 노동자들은 동맹파업과 함께 거리행진을 개최하고 ‘노동절 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해마다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를 크게 열고 대규모 거리행진을 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정부는 1994년 기념일을 5월 1일로 되돌렸지만 아직까지 명칭은 ‘근로자의 날’ 그대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민간독재이거나 군사독재였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불온한 것으로 간주했다. 국가권력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시키는 동시에 노동자 의식을 깨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일종의 우민화 정책인 동시에 굴종적인 국민 양산책이었다.

이제는 노동절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잘못은 무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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