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토목보치(土木堡恥)
[고전 속 정치이야기] 토목보치(土木堡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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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의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의 시대에는 환관 왕진(王振)이 대권을 장악했다. 1435년, 9세인 태자가 즉위했다. 그가 중국사상 가장 웃기는 짓을 저지른 영종이다. 그는 전쟁을 놀이로 생각했다. 어려서 왕진의 보호를 받고 자란 영종은 그를 깊이 신임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인종(仁宗)의 황후였던 태황태후 장씨와 양부(楊溥),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등 소위 ‘3양’의 보정(輔政)으로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정통7년(1442), 태황태후가 죽고, 삼양도 죽거나 은퇴했다. 정권은 왕진에게 넘어갔다. 왕진은 태조 주원장이 세운 환관의 정치개입금지령을 어기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왕진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따돌리기 위해 황제를 부추겨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켰다. 1441년, 운남성에 웅거하던 만족 추장 사임발(思任發)을 토벌하기 위해 15만대군을 동원했으나, 전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두 번째 전쟁은 더 황당했다. 왕진은 원의 잔존세력인 북방의 오이라트부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사사로이 화살촉을 만들어 오이라트의 좋은 말과 바꾸면서 변경의 안녕을 도모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명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중원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왕진이 강제로 말의 가격을 깎았다는 핑계로 오이라트 지도자 에센이 산서성 대동(大同)을 공격했다. 명군의 방어진이 잇달아 무너졌다. 왕진은 대공을 세워 자신에 대한 비난여론을 잠재우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황제를 부추겨 적을 물리치고 위대한 황제가 되라고 부추겼다. 친히 정벌에 나선 영종은 왕진과 함께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악천후까지 겹쳤다. 군량이 부족했지만 주둔지 부근은 인구가 적어서 현지수급도 어려웠다. 대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탈영자가 늘었다.

영종이 직접 출전한 것을 안 에센은 유인계를 사용했다. 먼저 주력부대를 철수시키고,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 명군을 포위하기로 했다. 대동에 도착한 명군은 에센군이 철수하자 추격했다. 그러나 매복에 걸려 명군은 전멸했다. 영종은 철수명령을 내리자 오이라트 기병대가 주야로 추격했다. 낭산(狼山)과 요아령(鷂兒岺) 일대에서 명군은 또 3만의 병력을 잃었다. 영종은 패잔병을 수습해 작은 요새인 토목보에 주둔했다. 토목보는 지대가 높아서 물이 없었다. 에센은 강화를 제안하고 후퇴하는 척했다가, 명군이 요새에서 나오면 섬멸할 계획이었다. 에센군이 후퇴하자, 영종과 왕진은 수원(水源)을 찾아 병영을 옮겼다. 갑자기 에센군이 사방에서 공격했다. 명군은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대패했다. 혼전 도중에 왕진은 영종을 보호해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말에서 내린 영종은 큰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장탄식했다. 그는 에센에게 사로잡혔다. 왕진을 비롯한 50만의 명군은 대부분 전사했다.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도 우겸(于謙)이 북경을 잘 수비해 명은 완전히 망하지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 후 명은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려고 했으며, 나중에 영종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국가의 위신이 크게 손상됐다. 권위를 잃은 영종은 형제들끼리 권력다툼을 벌이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이라트부족은 원의 후예로 명이 건국한 후에 신하로서 조공을 바치던 관계였다. 오이라트부는 명과 실력을 비교하면 절대 약자였다. 그러나 지도자 에센은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전쟁을 놀이로 생각한 철부지 영종은 처음부터 상대가 아니었다. 정치적 비난을 전쟁으로 무마하려고 했던 환관 왕진도 황당한 인간이었다. 에센은 영종을 인질로 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국가의 명군을 개인적 문제해결을 위해 활용하려던 영종과 왕진을 생각하며 역사의 교훈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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