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정치는 합의의 산물로서 실현되어야 바른 정치다. 여야가 의사당 안에서 국민의 관심이 되는 현안을 논의하고 협상해 각기 정당이 추구하는 정책과 국민 이해의 선(線)이 맞물린 점을 찾아 해결하는 게 최선이라 하겠다. 협상 과정에서 정당의 이익에 몰입하거나 기득권 보호에 치중하게 된다면 아무리 쉬운 사안이라 하더라도 잘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여야 어느 한쪽이 시간을 질질 끌거나 적극 반대에 나서게 되는데 요즘 여야의 모양새가 그렇다.

임시국회가 개회중이면 의원들이 상임위원회와 본회의를 운영해 현안 문제들을 해결해야함에도 올해 들어 우리국회가 개문정차한지도 오래됐다. 그러기에 국민들은 국회의원의 연봉을 대폭 감소하거나 상임위 등 회의가 열리는 날에 회의 참석수당을 지급해야한다고 일구동성이다. 현행 규정이 회의를 열지 않아도 꼬박 수당을 지급하고 있으니 일하지 않고 타먹는 돈맛은 또 어떠하겠으랴. 그런 경험은 없어도 어쩌면 무임승차보다 더 쾌감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국회가 신속처리안건 지정, 즉 ‘패스트트랙’에 갇혀 있다. 지난 22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그간 현안이 돼왔던 선거제 개편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관련 법안을 신속처리하기 위한 패스트트랙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그간에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과 정의당 등 소수 3야당에서는 국민이 공직선거에서 투표를 통한 정당 지지율과 국회의원 의석이 맞지 않는 등 문제가 있는 현행 공직선거법을 반드시 개정해야한다는 입장을 줄기차게 제기해왔다.

또 정부·여당에서는 청렴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위공직자부터 솔선수범해야한다는 입장에서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을 추진해왔지만 야당의 반대로 제대로 되지 않던 판에 소수3야당과의 합의를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한국당에서는 여야 4당의 선거제 개편안 등 패스트트랙 합의를 두고 ‘의회 쿠데타’로 규정하고 나섰고, 나경원 원내대표는 “의회 민주주의가 조종을 울렸다”며 강력히 반발하면서 자칫하면 국회 차원의 보이콧이라도 할 기세를 보이는 중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이 있듯 선거제도는 잘 구비돼 있어야 민주주의를 더 활짝 꽃피울 수가 있다. 지금까지 양당제도가 주축 기반을 보였던 우리나라에서 거대양당이 누리는 기득권은 상당하다. 의원 각자의 운명이 달린 판이다 보니 아무리 국민이 원하고 시민단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나서서 좋은 선거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도 별 소용이 없다. 거대 양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행선거법이 양당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제도인데 구태여 의석수가 줄어들고 의원 자신의 향방이 달린 선거제도를 변경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들만의 생각이다.

그래서 소수야당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제도를 개선해야한다며 당의 운명을 걸고 투쟁해온 것인데, 여당이 합의해 주어 일단 선거제도 개선에 파란신호등이 켜진 상태다. 이번에 민주당이 제1야당을 제쳐두고 소수 3야당의 손을 들어준 배경에는 정부·여당이 바라는 사법개혁의 핵심인 공수처 제도 마련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이다. 사실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수사하는 조직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운영해왔지만 검찰이 아닌 제3의 기관에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과 각료, 판사와 검사 등 고위공직자 비리에 대해 수사와 공소권을 가지는 문제는 필요했고, 국민 입장에서도 더 늦출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선거제도, 공수처 등 현안이 여당과 소수3야당에 의해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합의됐다고는 하나, 패스트트랙 지정 자체가 만사해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4당 합의안을 각 당이 전부 추인할 경우 오는 25일쯤에 공직선거법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공수처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법은 사법개혁특위에서 각각 신속처리안건으로 상정되게 된다. 적법 절차에 의해 국회 의결을 거치기까지 심의를 거쳐야 하는바, 처리 기간도 최장 330일이 소요되는 것이다.

선거법과 사법제도개혁은 국가와 국민 입장에서도 잘 실현돼야할 선결 과제다. 공수처나 검찰·경찰 간 수사권과 기소권의 조정 등 해묵은 논쟁은 말끔하게 공개적으로 국민의 공론을 얻어 제도화되는 것이 맞다. 시기상으로 늦출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당이 국민과 시민단체가 열망하는 좋은 선거제도 실현 논의에 소극적 행동은 이해가지 않는 면이 있다.

정당은 국민의 건전한 정치적 의사형성에 이바지해야할 의무가 있는바, 여야를 막론하고 국가발전과 국민이익을 위한 현안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협상해야 마땅하다. 갈등의 씨앗이 돼 극한으로 치닫는 패스트트랙 정쟁을 멈추고, 국민관심사는 안건 신속 처리해야 하고, 패스트트랙 기간을 채우지 않고 여야가 합의 도출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한국당은 ‘의회 민주주의의 조종’ 운운하며 고립을 자초할 것이 아니라 선제 협상에 나서는 것이 큰 그릇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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