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3)
[박관우 칼럼] 비운의 황제 고종의 파란만장한 생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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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고종(高宗)은 1852년(철종 3) 운현궁(雲峴宮)에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閔氏) 사이에 2남 2녀중 차남(次男)으로 출생했는데 아명(兒名)은 이명복(李命福)이요, 초명(初名)은 이재황(李載晃)이었으며, 즉위한 이후에 이희(李㷗)로 개명(改名)했다. 

1863년(철종 14) 12월 8일 철종(哲宗)이 승하(昇遐)한 이후 순조(純祖)의 아들이었던 익종(翼宗)의 아들로 입적(入籍)되어 익성군(翼成君)으로 책봉(冊封)된 이후 그의 대통(大統)을 잇게 되면서 제26대왕으로 즉위했다. 

여기서 고종이 즉위할 당시 철종의 아들이 아니고 익종의 아들로 왕위(王位)를 계승한 배경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철종은 33세에 승하했으나 조대비(趙大妃)는 익성군을 철종의 아들이 아닌 익종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해 대통을 잇게 했다. 

철종은 철인왕후(哲仁王后)를 포함해 여러명의 후궁들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으나 그중에서 영혜옹주(永惠翁主)만 생존하고 다른 왕자들은 어린 연령에 전부 세상을 떠났으므로 철종의 아들로 대통을 잇기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익성군을 선대왕(先大王)인 철종의 양자로 입적한 이후 왕위를 계승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조대비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익성군을 자신의 남편인 익종의 양자로 입적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새로 등극한 왕이 어리면 성장할 때까지 모후(母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는데 만약에 익성군을 철종의 양자로 삼는다면 자신이 아닌 철인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됐던 것이다.

당시 조대비는 56세였으며,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 27세에 불과한 철인왕후가 익성군의 모후가 되는 상황을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명분을 바탕으로 조대비는 더 이상 안동김씨(安東金氏) 가문(家門)의 집권(執權)을 허락하지 않고, 30년만에 풍앙조씨(豊壤趙氏) 가문이 집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익성군이 철종이 아닌 익종의 양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한 것인데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고종의 가계(家系)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恩信君)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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