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이야기] 그레이스 호퍼
[IT 이야기] 그레이스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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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철 기술경영학 박사

 

컴퓨터를 사용하는 중에 프로그래밍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의 현상을 ‘버깅(Bugging)’이라고 한다. 반도체와 같은 IT기기/부품 생산시 베타테스트를 실시하는 데, 이의 가장 큰 목적은 시스템의 실제 설치 이전에 이와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 운용해 보고, 이 과정 중에서 문제점을 의미하는 이른 바 ‘버깅’ 발생 및 기타 장애사항을 파악하고, 이를 제거하는 디버깅(Debugging)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레이스 M 호퍼(Grace Murray Hopper; 1906~1992)는 바로 버그와 고급프로그래밍 언어인 ‘코볼(COBOL)’의 창시자이다. 그녀는 최초의 프로그래밍 방식의 디지털 컴퓨터인 ‘마크원’을 만든 선구자인 에이킨(Howard H. Aiken)의 지도하에 본 마크원을 시작으로 마크2, 3의 개발에도 참여하면서 실력을 쌓아왔다. 디버깅이란 용어는 그녀가 당시 개발 중인 ‘마크투’ 컴퓨터 시험중 전지에 나방이 끼어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자, 벌레라는 의미인 “버그(bug)가 발견되었다”라는 말을 최초로, 업계에서 장애, 혹은 문제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호퍼는 최초로 영어를 사용한 컴파일러 언어인 ‘플로우매틱’을 개발했다. 이로써 기계어가 아닌 영어로, 즉 사람이 사용하는 이해가 가능한 언어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 뒤에도 호퍼는 본 플로우매틱을 발전시켜 고급프로그래밍 언어인 ‘코볼’을 개발해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인자가 됐다. 개발된 지 어언 60년이 지났지만 코볼은 지금까지도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기 설치 운용중인 응용프로그램들에 사용되고 있으며, 대용량 패치 및 트랜잭션 처리와 같은 작업에도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Fortran)이 주로 과학기술 계산용인 반면, 코볼은 대용량 데이터 처리를 위한 업무처리 및 관리분야용으로 자리 잡혀져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용이 가능한 이유이다. 현재 대기업 등에서 많이 사용하는 독일 SAP사의 기업회계전문 프로그램인 SAP의 주 언어가 ABAP인데, 이 언어의 기반이 바로 코볼이다.

호퍼는 이렇듯 컴퓨터 프로그래밍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이지만, 1983년에 해군준장으로 진급해 1986년에 퇴역한 미군 최초의 여성 해군제독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이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진주만 해군기지에서 현재 활동 중인, 미국의 이지스구축함(고성능 레이더와 대공미사일로 적의 대함미사일 공격에 대응하는 통합 전투체계를 갖춘 군함)인 DDG 70 Hopper는 바로 최초 여성제독인 호퍼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것이다. 토목기사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수학,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던 호퍼는 예일대에서 수리물리학박사를 취득하고, 약 10년 후인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 해군연구소의 컴퓨터 프로그램 책임자가 바로 위에 소개한 스승 에이킨이었으며, 그를 통해 프로그래밍을 수학하여 뛰어난 업적을 만들었다. 

1994년 호퍼는 국가의 명예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여성에게 부여하는 ‘전미 여성 명예의전당’에 헌액되어, 그녀의 업적을 영구히 추앙 받을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이 부여된 해는 연방수정헌법 제 19조가 통과된 1920년(참고로 영국은 이보다 겨우 2년 빠른 1918년, 프랑스는 1944년으로, 꼭 100년 전 3.1의거에 적극 참여하고 주도했던 한국 여성들의 자주권, 참여의식 등의 선도적 위대함은 분명 역사적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으로 이제 100년이 됐다. 전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자부하는 미국에서 조차, 여성의 인권이 명문화된 것이 이제 겨우 한 세기가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성차별의 시기에 여성으로 태어나, 시대적 한계를 넘어 아내이자, 군인, 과학자로서 호퍼는 끝없는 도전을 통해 인류사, 특히 IT역사에 있어서 불멸의 업적을 이루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한 여성과학자의 생애를 조명해 보면서, 도전을 넘어 자기성취를 향한 갈망과 노력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만들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의 성을 딴 ‘호퍼’보다는 그녀의 이름인 ‘그레이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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