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훈(윤봉길 증외종손자) 머세스버그 아카데미 학생

류석훈(윤봉길 증외종손자) 머세스버그 아카데미 학생
 

올해는 꺼져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불씨를 되살린 윤봉길 의거 87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봉길(1908~1932)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상해점령 전승기념 및 천장절(일왕생일) 경축식’에서 관병식을 통해 군사력을 대내외 과시하려고 식장으로 이동해온 상해파견일본군사령부를 기습 공격하여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 수뇌부를 섬멸했다.

이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특공대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승인을 받고 수행한 전투행위다. 이처럼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하기 위해 침략국과 싸운 무력투쟁을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해 임시정부를 포위하고 있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정부가 세운 특공작전을 과감하게 감행해서 한민족 독립운동사에서 그 어떠한 단위부대도 해내지 못한 영원불멸의 큰 전과를 거뒀다.

이 의거는 당시 김구 선생이 동포 집을 기웃거리며 밥을 얻어먹을 만큼 임정의 재정이 최악이라 존속자체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임시정부를 되살려 소생시켰다. 또한 의거에 크게 감동받은 중국 장제스 총통은 “중국 백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높이 평가하며 이후 임정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사실상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가장 큰 성과는 나라를 다시 찾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인애국단원들의 의거를 기록한 ‘도왜실기(屠倭實記)’의 국역판(1946) ‘서문’에서 ‘한국 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 총통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해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그 원인이 윤봉길의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밝혔다. 역사에 아마라는 가정법이 있을 수 없다지만 윤봉길 의사가 없었다면 임정 존속과 독립 또한 불가능 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1897년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류큐왕국(현재 일본 오키나와현 일대에 위치했던 독립 왕국)이 세계 2차대전 종전 후 독립하지 못한 것은 윤봉길과 같은 인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일본군까지도 윤봉길 의거를 군사 활동으로 규정한 점이다.

일본 육군이 1932년 9월 작성한 ‘상해 천장절 식중 폭탄흉변 사건’이라는 제목의 문서에 윤봉길 의거를 ‘조선독립을 위한 편의대원(민간복장의 특수부대원)의 공격’이라고 규정하고, ‘시라카와 대장의 사망을 공무 수행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전투 중 전사한 것으로 판정함이 옳다’고 기술돼 있다. 또 이 문서엔 상해 천장절 식장을 ‘상해전장(上海戰場)’으로 표기했다.

이처럼 일제는 시라카와를 전사자로 처리했다. 그리고 윤 의사 역시 상대 교전국의 ‘전쟁포로’로 간주하고 비공개 군사법정에 회부해 단심으로 형을 확정한 다음 군 형무소에 구금했다가 군부대 영내에서 총살형을 집행했다. 일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인이 기습 공격한 전투행위로 규정한 윤봉길 의거는 의열투쟁이라는 모호한 표현 대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고 침략국과 싸운 독립전쟁으로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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