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님 웨일즈의  ‘아리랑(Song of Ariran)’ ⓒ천지일보 2019.4.19
님 웨일즈의 ‘아리랑(Song of Ariran)’ ⓒ천지일보 2019.4.19

님 웨일즈(Nym Wales)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을 주인공으로 한 ‘아리랑’이란 책 저자로 한국 사회에 잘 알려진 미국의 여류 언론인이자 작가이다. 그녀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는 ‘중국의 붉은 별(1937)’이라는 책을 써서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1930년대 중국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공산혁명과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등 지도자들에 대해 알렸다.

마오가 이끄는 혁명세력은 중국 남부 농촌지역에서 세력을 키워가다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군 공격으로 수세에 몰렸다. 마오는 1934년 10월 강서성에 구축했던 근거지를 포기하고 10만 홍군을 이끌고 중국 서부 오지로 탈출했다. 그 길이 중국의 남부와 서부 11개 성(省)을 가로지르는 1만 2천㎞이며, 18개 산맥을 넘고 24개 강을 건너가는, 문자 그대로 대장정이었다. 그들이 1년여에 걸친 대장정을 끝내고 목표한 연안에 도착했을 때 90% 이상의 병력을 잃어 8천 명의 병사만 남았다. 그러나 주요 지도자와 핵심 병력은 보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7개월 후인 1936년 6월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쑨원(孫文)의 부인 송칭링(宋慶齡)의 소개장을 들고 연안에서 멀지 않은 시안(西安)에 도착하여 만주군벌 장학량(張學良) 군의 허락을 받아 연안 잠입에 성공했다. 그는 연안에서 4개월간 머물면서 서방기자로서는 최초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공산당 지도부를 취재를 하게 되었다. 마오는 스노우에게 열흘 동안이나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해 가을 스노우는 연안을 빠져 나와 면담한 내용을 북경의 ‘차이나 위클리 리뷰(China Weekly Review)’지에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그는 이 기사들을 묶어 이듬해 런던에서 출판했다. 이 책은 한 달 만에 2만 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에드가 스노우의 책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 표지 ⓒ천지일보 2019.4.19
에드가 스노우의 책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 표지 ⓒ천지일보 2019.4.19

에드가 스노우가 섬서성 연안으로 잠입했을 때 서방 세계는 중국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던 공산 혁명 상황과 그 혁명 지도부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어 답답해하던 때였고,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끝낸 터라, 외부 세계에 자신들을 알리고 싶어 하던 시점이었다.

남편의 잠입취재 후 님 웨일즈 또한 공산당 지도층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1937년 5월 그녀는 연안으로 잠입했다. 그녀는 중국 혁명 지도부들의 평생 친구가 되어 건국 후에는 중요한 중국 국경절에 초대받아 천안문 위 사열대에 서기도 했다. 그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연안에서 한국 혁명가 장지락을 만나 그의 열정과 신념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님 웨일즈의 본명은 헬렌 포스터(Helen Foster)이다. 헬렌 포스터는 1907년 미국 유타주 남부 시덜시(Cedar City)에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개척자 후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존 무디 포스터(John Moody Foster)는 스턴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는데, 님 웨이즈가 태어난 후 변호사가 되기 위해 시카고에서 로스쿨을 다니느라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녀는 십대 중반 때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할머니와 숙모와 함께 살며 고등학교에 다녔다. 고교시절 그녀는 교지 편집도 했고, 학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녀는 아버지 모교인 스턴포드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비싼 학비 때문에 유타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졸업하지는 못했다. 당시는 경제공황기여서 장녀로서 세 동생들을 돌보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녀는 미국 은광산협회 유타 지부 비서로 근무하며 돈을 벌었다. 그녀의 꿈은 유명한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을 위해 당시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이 하던 것처럼 파리로 가서 글을 쓰고자 국무성 공무원시험을 보았다. 시험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유럽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녀는 중국 상하이에 자리를 얻어 1931년 8월 작가가 되는 꿈을 안고 아시아로 가는 배를 탔다.
 

1932년 상해사변 때 상해시장(오른쪽)을 취재하는 헬렌 포스터 스노우 ⓒ천지일보 2019.4.19
1932년 상해사변 때 상해시장(오른쪽)을 취재하는 헬렌 포스터 스노우 ⓒ천지일보 2019.4.19

상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인 신문기자 에드가 스노우(Edgar Parks Snow, 1905~1972)를 만났다. 그는 2년 전인 1929년 중국으로 왔었는데, 말라리아에 걸려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헬렌을 만난 에드가는 중국에서 더 활동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헬렌은 에드가의 기사를 열독했고, 모든 기사를 스크랩했다. 헬렌도 틈틈이 ‘시애틀 스타’라는 신문에 기사를 보내며 어머니가 선물한 카메라로 동양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풍광을 찍어 전송했다. 그녀가 도착하자 대형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도착한 지 1주일 후 중국의 중부지역에 600㎜가 넘는 폭우가 쏟아져 양쯔강이 범람했다. 피해는 엄청났다. 60만 명이 죽고, 12만 명이 실종되었으며 12만 채의 주택이 피해를 입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여 상해사변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4개월 전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손에 넣었는데 세계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상해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헬렌이 사는 조계지를 근처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그녀는 자주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시가전 광경을 관찰했다. 헬렌은 에드가처럼 종군기자로서 가까이서 전투현장을 보며 사진도 찍고 싶었다. 에드가가 그녀에게 종군기자 신분증을 얻어 주었다.

아마도 헬렌은 전쟁 발발 3개월 후인 4월 29일 일본군의 승리 축하 퍼레이드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홍커우 공원 일본 천왕 생일 축하행사장에 한국인 청년 윤봉길이 던진 폭탄의 굉음을 들었을지 모른다. 일본군 4성 장군 시라가와(白川) 등이 폭사당한, 세계가 놀랄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녀도 달려가 취재를 했을 것이다. 헬렌은 한 1년 정도만 중국에 머물 생각이었으나 1932년 12월 크리스마스날 에드가와 결혼하고 중국에 더 머무르게 되었다.

에드가가 옌찡대(燕京大, 오늘날 북경대 전신)에서 언론학을 강의하게 되어 부부는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들은 대학 근처에서 살며 펄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 시기 중국 국민들은 만주를 빼앗기고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적극적인 항일전을 벌이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많았다. 대학생들이 항일투쟁과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 헬렌과 에드가의 집은 치외법권의 특권이 있었기 때문에 운동권 학생들에게 정보제공과 피신처가 되었다.
 

마오쩌둥과 함께 있는 헬렌 포스터 스노우(오른쪽 끝), 님 웨일즈라는 필명의 헬렌 포스더 스노우 ⓒ천지일보 2019.4.19
마오쩌둥과 함께 있는 헬렌 포스터 스노우(오른쪽 끝), 님 웨일즈라는 필명의 헬렌 포스더 스노우 ⓒ천지일보 2019.4.19

1935년 헬렌은 12.9 엔칭대 학생 시위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그날 수천 명의 학생들이 북경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북경의 시위는 중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1주일 뒤인 12월 16일에는 28개 학교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더 큰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에드가와 헬렌의 집을 비밀 아지트로 활용했다. 이때 에드가 부부를 따르는 학생 중에 황화(黃華, 1913~2010)도 있었다. 황화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상의 중국측 대표였고, 우리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중국의 제5대 외교부장(1976~1982)을 지냈다. 에드가 부부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좌익 학생운동을 도우며 ‘민주주의’라는 잡지도 간행했다.

헬렌은 1937년 4월에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연안으로 잠입했다. 연안에서 헬렌은 마오와 인터뷰를 했다. 1년 전 에드가가 여러 날 그와 인터뷰를 했지만, 홍군(紅軍)의 역사에 대해 털어놓은 것은 헬렌에게 처음이었다 한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그들이 ‘인민의 영웅’으로 비치게 되지 않도록 그전까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다.

연안에 있던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북경을 포함한 중국 북부가 일본군 치하에 들어갔다. 헬렌은 계획보다 더 오래 연안에 머물게 되었다. 작가를 꿈꾸는 그녀는 연안에서 매혹적인 주제가 될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 마오와 같은 지도자도 만났고, 군 지휘관, 사병, 여성들도 만났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채워주는 인물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문제는 언어였다. 영어로 소통이 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헌자료는 죄다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연안에서의 김산 ⓒ천지일보 2019.4.19
연안에서의 김산 ⓒ천지일보 2019.4.19

연안에 온 지 보름째 되는 날 헬렌은 연안 중심을 흐르는 연안하(延安河)를 따라 난 길을 걷다가 루쉰(魯迅)예술학원이라는 고딕 양식의 옛 천주교 성당 건물 앞에 다다랐다. 안내하는 북경대 운동권 학생 황화가 “혁명에 필요한 예술가를 양성하는 학교”라고 설명했다. 성당 부속건물에 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 사서가 “영문 소설과 잡지도 백여 권 있다”고 친절하게 말했다. 그녀는 말도 잘 통하지 않은 연안에서 영문 서적이 있는 것에 놀라며, 빌려 볼 책을 고르느라 책들을 뒤적였다. 그런데 거의 절반에 이르는 영문책 대출카드에 한 사람의 이름만 계속 나왔다. “장명” “장명” “장명” “장명” “장명” “장명” ….

“이 사람이 누굽니까?”

“조선에서 온 혁명가입니다.”

사서가 대답했다.

“지금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어를 하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헬렌은 메모지에 간단한 편지를 써서 서양식 봉투에 넣어 도서관 사서에게 맡겼다. 한동안 도서관에 들리지 못했던 장지락이 도서관에 들렀다가 대출한 책과 함께 편지봉투를 전달받았다.

“친애하는 장명 씨에게, 저는 미국에서 온 작가입니다. 도서대출카드를 보고 당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당신이 조선을 대표하는 혁명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조선 독립과 당신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는 낯선 서양 여성의 편지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망설이다 편지를 책갈피 속에 끼워두고 응답하지 않았다. 열흘 뒤 인편으로 또 편지가 왔다.(다음 편에 장지락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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