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김영두 경제학 박사

4.19 당시 대학생연맹 총무 맡아

1969년 스웨덴에 정치적 망명

‘촛불혁명’ 뒤 50년 만에 귀국

 

“4.19엔 보수·진보 따로 없어”

“혁명세력이 질서유지까지 해내”

“세계혁명사 유래 없어 자긍심”

“4.19 의미 왜곡된 부분 있어”

“지금이라도 다시 정리해야”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통치자와 지도계급이 나라를 망치고 배신했을 때, 버림받고 천시 받았던 절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은 민족을 배신하지 않고 뭉쳐서 나라를 지켰죠. 이것이 언제나 정의의 편에 합세해 지켜온 우리 배달민족의 기상입니다. 4.19혁명은 이런 특성이 잘 나타난 민족혁명입니다. 지금이라도 그 의미가 바르게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끝내기 위해 1960년 일어난 4.19혁명이 올해로 59주년을 맞았다. 1960년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영두 박사는 4.19혁명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다. 4.19혁명을 주도한 ‘4.19혁명전국대학생총연맹’ 총무를 맡았던 김 박사는 ‘4.19혁명 완성을 위한 질서유지 대학생 협회’ 3명의 창설자 중 1명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민주주의 조국을 누구보다 꿈꿨던 김 박사는 그러나 50년 세월을 한반도 바깥에서 보내야 했다. 노르웨이에서 연구 장학금을 받게 돼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났던 유학길에서 당시 박정희 정부의 압박으로 인해 귀국을 포기하고 1969년 스웨덴으로 정치적 망명을 택한 것이다. 그는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는 등 50년의 시간을 보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조국을 그리워하던 김 박사는 2017년 전격 귀국해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이른바 ‘촛불혁명’이라 불리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모습을 보자 그는 귀국을 결심했다. 4.19 당시 상황이 그의 마음에 오버랩 됐을까. 5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바라본 4.19는 김 박사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지 궁금했다. 본지가 4월 19일을 앞두고 김 박사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 박사는 “해외에서 ‘대학생혁명(April Student Revolution)’으로 불리는 4.19혁명은 겨울방학에서 학교로 돌아온 고등학생·대학생들이 울분을 터트린 학생혁명이면서, 동시에 우리시민들이 지지·후원해 완성시킨 시민혁명”이라고 4.19혁명의 의의를 설명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개표 조작 등을 벌이자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중심이 돼 부정선거 무효 등을 주장하는 4.19혁명을 일으켰다. 당시 규탄 시위를 하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열사가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김 박사는 “당시 저는 전북 정읍의 절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큰 울분을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국의 대학생이 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4월 18일 개학을 맞은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학생 중 가장 먼저 시위를 시작하면서 전국적인 학생 시위의 서막이 열렸다.

그는 “고대생을 시작으로 4월 19일 전 서울의 모든 대학생들이 일제히 상아탑에서 책을 버리고 뛰쳐나와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제정치타도를 외치면서 서울의 온 중심가를 덮어버렸다”며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서부터 광화문, 종로와 을지로,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거리를 학생들로 가득 매웠다”고 밝혔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이어 “늦게 도착한 동국대학교 학생들은 자리가 없어 앞으로, 앞으로 밀려가 경무대 앞까지 가게 됐는데, 이때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사상자가 발생했다”며 “동지들의 피를 본 학생들은 분노해 서울신문사를 불살라 버렸다. 당시 대학생간 동지의식은 매우 깊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뿐만 아니라 길가에서 구멍가게 하던 아주머니들도 음료와 음식을 갖고 와 학생들을 후원했고, 구두닦이 소년들과 신문배달부 등 각계각층에서 참여했다”며 “4.19혁명엔 보수와 진보가 없었고 모든 학생과 시민은 하나가 됐다. 이렇게 즐거운 정치혁명은 처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4.19가 전 세계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혁명 세력이 완전한 질서유지까지 달성했다는 점 때문”이라며 “이는 세계혁명사에서 최초였고, 당시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4.19혁명 학생대표자들을 초청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50년 만에 한국에 와 보니 이런 내용들은 사라지고 왜곡됐다며 “당시 질서유지를 위해 제작했던 플래카드를 모교에 기증했는데 지금 찾아보니 없더라”고 안타까워했다.

또 그는 “일부에서 4.19혁명이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됐다. 당시 민주당 정권은 우리 민주 헌정사상 최초로 절대다수의 주권자인 민주시민에 의해 선택된 정권”이라며 “4.19 이후 빈번했던 시위도 민주사회에서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빨갱이란 누명을 씌워 탄압한 결과로 지하로 숨거나 해외로 도피하거나 해외에서 귀국조차 못한 독립투사들이 많았다”며 “4.19혁명은 독립투사들이 대거 귀국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영두 박사가 4.19를 앞두고 3일 서울 시내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19

김 박사는 “그러나 혁명이 있은 지 1년이 지나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4.19 이후 상황이 무질서했고 부패했다는 거짓말로 자신의 쿠데타를 합리화했다”며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4.19를 잘 알지 못하는 ‘사이비’ 민주인사들도 혁명 주역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혁명의 가치를 흐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망명으로 한국을 떠나 있은 지 50년. 그 사이 본인이 경험했던 4.19의 의미가 달라진 것 같아 씁쓸한 마음도 들었지만 김 박사는 여전히 4.19의 정신을, 한국 민초들의 힘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4.19의 의미가 바로서는 것이 더욱 더 간절했다.

“지금은 국민소득(GNI)이 3만 달러가 넘고, 모든 국민이 자발적으로 나와 촛불을 들고, 5000년 만에 우리 민족이 남북 평화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럴 때 여유를 갖고 우리의 중요한 민주혁명이자 민족혁명이었던 4.19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정리하는 그런 단계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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