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4.19 혁명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작을 알리다
[4.19혁명] 4.19 혁명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작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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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당시 대학교수단 시위. (출처: 4.19혁명 기념 도서관)
4.19 당시 대학교수단 시위. (출처: 4.19혁명 기념 도서관)

범국민적 시위… 독재정권 타도

한국시민에 민주주의 정신 심어

[천지일보=이대경 기자] 59년 전 4월 19일 전국 각지에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희생된 사람들이 있었지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고취한 4.19 혁명의 전개과정, 한계와 의의를 정리해봤다.

◆김주열 사망으로 4.19 촉발

한국민주화운동사에 따르면 4.19혁명의 주요 원인은 ▲높은 언론의 영향력 ▲생각보다 높은 교육 수준 ▲도시화와 매스미디어의 보급 ▲청년실업의 증가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 등이다.

1960년 3월 15일 선거날에 발생한 폭력과 부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먼저 경찰과 정부당국은 선거 전에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는 사전 투표를 시행했다. 투표지는 모두 이승만과 이기붕으로 기표된 표였다. 대리투표는 물론 물품을 뿌려 자유당 후보로 투표유도, 투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3인조나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시키기도 했다.

먼저 대구에서 일어난 2.28 학생민주의거와 3.15부정선거 후 광주와 마산 등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해 사망했다. 3월 15일 당시 실종자로 처리된 김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고 이 의거는 4.19 혁명의 불씨가 된다.

김주열 열사 시신. (출처: 인터넷 화면 캡쳐)
김주열 열사 시신. (출처: 인터넷 화면 캡쳐)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8일 시위를 하던 고려대학생들에 대해 깡패들이 폭력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에 대학생들은 21일 예정했던 시위를 앞당겨 19일로 변경했다.

소위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이날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오후 1시쯤 시위대의 규모는 일반시민들을 포함해 약 10만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였고 여러 방면에서 경무대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학생들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 당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부민관)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대통령에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당시 발포로 인해 총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 경찰 측 사망자도 3명이 포함돼 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이날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됨으로써 시위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경찰과 달리 계엄군은 중립을 지키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했다.

1960년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문 발표로 소강 돼가던 시위를 재점화했다.

당초 60여명이 모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대학교수 258명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와 행진을 진행했다.

교수들이 참여한 시위는 ‘선거재실시’기 주요 요구인 이전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 시위를 기점으로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1960년 4월 26일 시민·학생대표 5명과 이 전 대통령의 면담이 진행되고 10시 20분경 마침내 이 전 대통령은 하야의사를 밝히고 다음날 하야했다. 이후 하와이로 망명해 거기서 사망했다

◆한국민주주의 시작점

4.19 혁명의 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지만 반공보수가 당내의 정책인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했다. 또 민주당 내부에서도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간의 분열로 권력을 잡은 민주당은 사태수습은커녕 혼란만 가중되는 상황이 지속됐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시대를 맞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한계점이 있지만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한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심었다는 점과 한국 민주주의의 첫 승리이자 국민의 손으로 직접 독재자를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19 당시 학생들 시위. (출처: 4.19혁명 홈페이지)
4.19 당시 학생들 시위. (출처: 4.19혁명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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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2019-04-21 07:57:02
한 정권이 국민을 배반 했을때 무너지는 것도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