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국경을 넘어 다민족이 하나 되고,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타 민족도 아닌 동족끼리, 강력한 선을 긋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립과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한의 교도소와 유사한 북한의 ‘교화소’엔 1200명 정도가 수감돼 있는데, 그 이유는 남한의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다. 남한의 대중문화의 인기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이를 차단키 위한 수단이다. 불쌍하고 어리석은 집단이다. 이는 시대의 순리와 만물의 섭리를 거역하고 역행하는 무지와 무식의 소치요, 자멸의 첩경임을 어찌하면 깨닫게 해 줄 수 있을까.

이제 말하고 싶은 것은 정작 따로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대를 분별치 못하고 있는 다른 측면의 ‘이면적 북한 내지 세력’이 또 있다.

그 세력은 다름 아닌 이 시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사상적 정신적으로 볼 때 북측의 사상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면적으로 같다는 뜻이니 말에 트집을 잡을 필요는 없다. 할 말이 있다면 말로 이의를 제기하면 될 것이고, 이의에 대해선 분명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오늘날 장로교가 주축이 된 소위 자칭 정통교단에선 양떼 즉, 성도들에게 마치 북한과 같이 강제적으로 강요 내지 막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강요한다는 걸 보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르치며 강압적으로 따르게 함을 직감할 수 있다.

한편 이 대목에서 또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고 있음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신들의 말을 따르라는 강요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보자.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첫 번째, 비유를 배우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어디선가 비유를 가르치고 풀어주고 해석해 주는 곳이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록됐으니 비유를 알지 못하면 죄사함을 받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신앙을 하는 이유는 구원 즉, 천국과 영생이다. 그렇다면 비유를 알지 못하게 한다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두 번째, 예수의 재림을 언급하지 못하게 한다. 이유인즉,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데 무슨 성경을 공부하고 재림을 기다리느냐고 성경적무식의 절정에 이른 표현을 하고 있다. 물론 다는 아니다. 오늘날의 신앙은 구약시대도 아닌 신약시대 즉, 예수님과 그 사도들이 피 흘려 돌아가시며 약속한 신약, 즉 새언약을 믿는 새언약의 시대다. 그런데 그 신약의 핵심은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그 소망을 붙잡고 이천년을 기다려 온 것이다. 즉, 다시 오실 때는 어떤 징조가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지, 어떤 노정으로 오시는지, 누구에게 오시는지, 와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지 등을 알아, 약속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다.

예수께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미리 경고하셨다. 앞의 소경은 눈은 떴으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 즉, 오늘날의 종교지도자요, 뒤의 소경은 그 영적 소경된 지도자를 철없이 따르는 성도들임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세 번째, 요한계시록을 말하면 이단 삼단 하며 기를 쓰고 배우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계시록은 예수재림 때의 사건을 사도 요한을 통해 환상 가운데서 미리 예언해 놓은 기독교 말세의 사건이다. 이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깨달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못 박았다. 여기서 복(福)은 바로 구원이요, 천국과 영생이다. 즉, 우리가 신앙을 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이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속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초림 때와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낸 사자를 욕하고 훼방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는 않다. 신앙의 목적인 영생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알 수 있는 방법 또한 성경은 제시하고 있다. 즉, 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천년 전, 예수를 그렇게 핍박하던 사울이 바울 된 것도 계시를 통해서 가능했음을 성경을 통해 깨닫는다.

이천년 전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또 계시의 말씀을 받고, 그 받은바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신약의 약속에 거하는 우리도 예수님이 택할 목자가 약속돼 있고, 그에게 이 요한계시록의 말세에 나타날 사건을 보여주시고 먹여주시고 즉, 계시하시고 그를 통해 예언대로 나타난 계시록의 사건을 예언을 들어 그 예언대로 나타난 실상을 증거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약속된 사자 앞으로 나와, 그 사자를 통해 증거되는 증거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천년 전에도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말이 있으며, 예수의 말을 듣고자 하면 출회를 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예라고까지 했다. 목마른 심령들이 먹을 물을 찾아 나서는데,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님을 알자. 이젠 하나님의 양떼를 그 주인에게로 보내야 하는 시대임을 명심하고 매 맞을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선 마지막 때가 되면 초림 때와 같다고 미리하신 말씀이 바로 이 시대가 어떤 때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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