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임시정부청사 앞에서 귀국을 앞두고 찍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한국독립당원들 (제공: 만화가 박건웅씨) ⓒ천지일보 2019.4.10
중경임시정부청사 앞에서 귀국을 앞두고 찍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한국독립당원들 (제공: 만화가 박건웅씨) ⓒ천지일보 2019.4.10

3.1정신 이어 상해 수립

국호·헌법을 최초로 공포

 

항일 군사·의열 투쟁 주도

삼권분립·민주공화제 정부

[천지일보=이민환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지난 1919년 4월 11일 수립했고,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다.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가 된 3.1 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사건으로, 남녀노소는 물론 계층 구별 없이 전국적인 참여로 전개된 비폭력 저항이었다. 이 정신은 지난 2016년 촛불혁명까지 이어져 국민 스스로 주도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거듭나게 했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회이며 임시정부의 입법부의 역할도 맡았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법상 한국국민을 대표하는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구성된다. 의회 구성은 도별 대표와 비례대표가 있었고, 의정원의 구성형태는 단원제 의회였다.

1919년 4월 10일 개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사전조직이자 임시정부의 의회이기도 했다.

이 의정원의 주요 역할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의결했고,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채택하여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입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이처럼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사의 큰 전환점이었으며, 현재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커다란 밑거름이었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다. 특히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였으며, 항일 독립운동을 총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항일 군사·외교 활동으로 독립 인정

임시정부의 가장 큰 활동 중 하나인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가 주된 활동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 의거는 실패했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때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또 1920년엔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했다. 당시 외교활동으로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승인됐고,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등의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그 결과 1945년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천지일보=강은영 기자] 한 시민이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임시의정원, 미래를 품다’ 특별전을 관람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임시의정원의 활동과 관련된 사료를 전시한 것으로, 역사적 흐름을 기초로 상해와 중경, 서울 등 공간에 따라 구성했다.ⓒ천지일보 2019.4.8
[천지일보=강은영 기자] 한 시민이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임시의정원, 미래를 품다’ 특별전을 관람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임시의정원의 활동과 관련된 사료를 전시한 것으로, 역사적 흐름을 기초로 상해와 중경, 서울 등 공간에 따라 구성했다.ⓒ천지일보 2019.4.8

◆광복 이후 정부 수립, 한국전쟁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대한민국은 38도선 북쪽에는 소련이 남쪽에는 미군정이 들어섰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8년 남북회의에서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면서 남북 분단이 외세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상에서 북한군이 불법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6.25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처음 열렸으나,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투가 반복되며 협상은 약 2년간 이어졌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한국군 대표 없이 유엔군 대표 클라크, 북한 대표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가 ‘정전협정서’에 서명하면서 지금까지 휴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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