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우리 역사를 보면 성군시대 청백리들이 많았다. 임금이 탐관을 멀리하고 올바르게 사는 인재들을 가려 썼기 때문이다. 우의정까지 지낸 청백리 유관(柳寬)이 낡은 집에서 살며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받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종은 직접 빈소에 까지 찾아와 조문하고 통곡했다. 

탐라 제주도에는 지금도 이약동(李藥童) 목사의 청백일화가 전해진다. 이름은 어머니가 금오산 약사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린 끝에 얻은 자식이라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탐라지(耽羅志)에 보면 이임할 때 관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남겨두고 나섰다가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문 위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관의 물건이라면 채찍 하나라도 자신의 것을 삼지 않았던 청백함을 보여준다. 76세에 고향 하로 마을로 낙향할 때는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이 같은 청렴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명종실록을 보면 당시 얼마나 청렴한 관리가 없었나를 실감 시켜준다. 명종 6년 11월 2일 왕이 어전에서 중신들을 인견하고 교시했다.  

‘재상으로부터 서관(庶官)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청렴한 사람을 등용해야 할 것이니… 어리석은 자를 도태하고 청렴한 자를 승진시킨다면 탐오(貪汚)한 풍습은 거의 제거될 것이다.’

명종은 또 이렇게 말했다. ‘백성의 삶이 날로 피폐해가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전에 진복창(陳復昌)이 바른말을 잘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자 같아서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소인이 되었고, 그의 말을 들으면 청렴한 듯했는데 결국은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고 들었으니, 언행(言行)이 이처럼 다른 것인데 어떻게 모두 믿겠는가… 신하들이 한갓 사정에만 얽매여서 나라가 소중한 줄 알지 못하니 나라가 편안하겠는가.’

명종은 어린나이에 임금에 올라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때 윤원형등 외척이 득세해 부정부패가 성행했다. 절대 권력이 낳은 부정부패의 만연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도 침묵을 지켜야 했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자 제일 먼저 탐관의 배재에 나선 것이었다. 인재들은 정치에 혐오를 느껴 산간에 숨고,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살펴보니 뜻밖에 두 얼굴이었음을 명종은 개탄했다. 

태형(笞刑)은 곤장이란 형벌보다는 약한 것이었다. 사대부도 작은 잘못이 있으면 태를 맞았다.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남녀관계의 추문에 관여된 이들이 잡혀가 태를 맞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임진전쟁 중에도 작은 부정이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무관들이 태형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나라로 알려진 청렴국가 싱가포르에서는 지금도 ‘태형’이 존재한다. 전근대적 유산인데도 왜 이 제도를 지키고 있을까. ‘태’가 있음으로 관리들이 탐욕을 자제하는 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청렴한 덕목을 갖춘 인재들이 없는 것인가. 이번 국회청문회에 나온 장관후보자들은 모두가 집이 몇 채 씩 되는 부자들이다. 불법, 탈법에 걸리지 않는 이들이 없는 것 같다. 명종이 이를 들었다면 땅을 치고 분노했을 사안이다. 

요즈음 시대 굳이 유관이나 이약동의 청렴잣대를 들이 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름지기 국정을 올바르게 집행해야 할 장관이라면 어느 정도는 바르게 살아 온 이들이어야 한다. 대통령이 너무 코드에 집착하면 인재풀은 좁아진다. 생각을 바꿔야 지지율도 올라가고 나라가 조용해질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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