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최근 지역 사회에서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자락에 있는 다보사에 유물이 옮겨진 ‘보광사’가 나주시 신기마을(보광골) 앞산(금성산 자락)에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 일고 있다. 사진은 보광사 절터 추정지 올라가는 길 입구 ⓒ천지일보 2019.4.7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최근 지역 사회에서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자락에 있는 다보사에 유물이 옮겨진 ‘보광사’가 나주시 신기마을(보광골) 앞산(금성산 자락)에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 일고 있다. 사진은 보광사 절터 추정지 올라가는 길 입구 ⓒ천지일보 2019.4.7

호남역사모임 ‘나주미래포럼’

확인 안 됐던 보광사터 발견
“보광사서 다보사로 괘불 이전”
“보광사·보흥사 같은 곳 추정”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호남지역 학자들이 “보물 1343호 다보사 괘불탱의 원봉안처인 ‘보광사’ 터로 추정되는 절터를 처음 발견했다”며 나주 신광리 신기마을 앞 금성산 자락을 보광사 터로 지목했다.

8일 지역 역사학자들로 이뤄진 나주미래포럼은 “다보사가 본래 보광사의 암자였다”며 “‘보광사’ 터로 추정되는 절터를 나주시 신광리 신기마을 앞 금성산 자락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나주미래포럼의 이계표 호남불교문화원장(현 전남도 문화재위원)은 “그간 수차례 보광사 터를 찾기 위해 금성산 일대를 방문했다”면서 “최근 추정지에서 절터의 석축과 기왓장 조각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는 “유물과 구전으로 보광사 터로 확신하지만 사유지여서 공식 확인은 박물관 등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화기에 괘불탱의 원봉안처로 기록된 보흥사가 보광사와 같은 곳일 가능성이 있다”며 “학계 관련분야 연구자와 학술조사 기관의 정확한 조사와 기획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지역 학자들과 나주시민들이 보광사에 관심을 두는 이유 중 하나는 보물 1343호로 지정된 다보사 괘불탱이 보광사에 있었다는 설 때문이다. 다보사(多寶寺)는 금성산 남쪽 기슭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절로 ‘아담하지만 문화재가 많은 천년 고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간 보물의 원봉안처로 알려진 보광사는 구전으로만 내려올 뿐 그 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실제 다보사 괘불탱의 문화재 지정 당시의 기록인 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 15, 다보사괘불탱(성보문화재연구원, 2018년)에 따르면 ‘조사자들이 보흥사의 기록이 전무하여 그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나주미래포럼’ 회원 이계표 호남불교문화원장은 “학계에선 금성산에 있었다는 보광사(普光寺)와 보흥사(普興寺)에 관해서 기록이 전무(全無)하다고 하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며 운을 뗐다. 이어 “나주 금성산에는 보광사·보흥사가, 나주읍성 안에는 금륜사·법륜사 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 데 사찰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다보사 주지였던 우화선사(雨華禪師:1903~1976년)가 생전(生前)에 현재의 “‘다보사의 유물은 보광사에서 가져온 것이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금성읍지 및 정윤국의 나주목지(羅州牧志, 제일문화사 광주, 1989, 321쪽)에 따르면 ‘1950~1976년 다보사 주지를 지낸 우화선사(雨華禪師:1903~1976년)는 다보사는 보광사가 폐사된 후에 그 절 유물을 이곳에 옮겨 놓고 ‘다보사’라 하였다’고 했다”며 또한 “태종실록에도 보광사를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한 기록이 있으며, 이능화 편 ‘조선불교통사’(1918년)에도 보흥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괘불탱의 화기에 의하면 다보사 괘불탱의 원봉안처는 ‘보흥사’로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보흥사 괘불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보사로 옮기게 됐고, 지난 2002년 7월 2일 보물로 지정됐다.

두산백과에도 다보사괘불(불화)은 1745년(영조 21)에 제작해 나주 금성산 보흥사에 있었던 것으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 불화승인 의겸을 비롯한 9명의 화원이 공동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돼 있다.

이 원장은 보흥사와 보광사가 같은 곳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그는 “보광사는 15세기 조선 태종(太宗)대에 자복사로 지정될만큼 사격이 높았으나 16세기에 폐사가 되었다. 보광사가 다시 18세기 중반에 사찰건축 복원불사가 이뤄지고 괘불이 조성되면서 사격(寺格)이 일신(一新)되어 사명(寺名)이 보흥사(普興寺)로 개명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고 말했다.

나천수(한문고전번역학 박사, 전남대) 박사도 보광사에 관한 기록에 대해 “나주출신으로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노촌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의 문집인 노촌집(老村集)에 보광사가 언급되었다”며 “시 ‘흥룡동을 경유하여 보광사에 들어가다’는 ‘由興龍寺 入普光寺’란 제목으로 7언 율시이다. 이 시는 1709년과 1718년 사이에 편차 된 것으로 보아 1710년대 작품으로 보인다. 당시 보광사가 존립해 있었고 보광사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주민들도 오래전부터 어릴 적 기억과 지역 어른들의 구전을 통해 보광사 절터로 신기마을 앞 금성산 자락을 지목했다.

이영기(탯자리나주곰탕 운영, 수의사)씨는 “보광골(신기마을, 신광종점)은 원래 열무로 유명했는데 어머니가 보광골 열무로 김치를 담가 주신 기억이 있다”며 “그곳 어르신들에 따르면 이 마을(절골)은 스님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고 오래전에 그 산을 자주 오르내렸는데 그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시누대(조릿대)숲 등도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서예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천호씨도 “금성읍지와 한국한시집 등에 따르면 나주목사(1358.6~1361.3.3)를 역임한 이방직(李邦直)의 시에도 절과 풍경을 노래하는 한시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영기씨는 “나주는 전라도 정명(定名) 천년의 도시로 오랜 역사와 문화만큼 많은 사찰이 있는 곳”이라며 “다보사의 옛 절터로 추정되는 ‘보광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학술적인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 나주시, 전남도, 문화재 관련 기관 등에서 보광사 절터를 면밀히 조사해 지역 역사 문화 자부심을 살릴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최근 지역 사회에서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자락에 있는 다보사에 유물이 옮겨진 ‘보광사’가 나주시 신기마을(보광골) 앞산에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 일고 있다. 사진은 보광골(전남 나주시 신기마을). 당시 스님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는 지역민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7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최근 지역 사회에서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자락에 있는 다보사에 유물이 옮겨진 ‘보광사’가 나주시 신기마을(보광골) 앞산에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 일고 있다. 사진은 보광골(전남 나주시 신기마을). 당시 스님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는 지역민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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