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작가

흔히 업적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 사람은 참 좋은데 말이야.” 이때 말하는 사람이 좋다는 말은 그저 던진 위로가 아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왜 업적을 만들지 못하는 걸까? 답은 그들이 사람이 좋기 때문이다.

그들은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어울려 놀기를 좋아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을 만나는 데 사용한다. 물론 이런 성격이 어릴 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주변에 많은 친구들을 둘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면서 상황은 바뀐다.

사회는 친구 이전에 어떤 일을 만들었고, 성과가 어땠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개인의 발전을 위하여 사용할 시간이 부족하다. 무슨 일이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꾸준하게 집중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그런 고민과 고독의 시간이 없는 사람에겐 업적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억울하면 출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좋은 사람으로 살겠다’는 당신의 다짐을 ‘야망이 있는 사람으로 살겠다’로 수정해야 한다. 업적을 이루는 사람들은 무모할 정도로 강력한 야망을 품고 말없이 앞으로 걸어간다.

삼성에 대한 책과 이병철, 이건희 회장의 일생을 담은 여러 책들이 출간되어 있다. 그 책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책을 쓴 모든 작가가 이건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삼성그룹에 대해 쓴 사람은 삼성은커녕 직장 생활조차 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그와 다르지 않다.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연구를 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그들과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만약 내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었다면, 그리하여 친분이 쌓였다면 그 친분은 내가 책을 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나는 자기계발 전문가의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전기작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삼성가의 여자들 원고를 쓰게 된 데에는 하나의 시작점이 있다. 그건 강남 압구정동 한 거리에서 우연히 이부진을 봤을 때였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숨을 멈춰야 할 정도로 갑작스레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유모 두 명과 함께 있었는데, 유모들은 타이트하지 않은 검은 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있었고, 그 뒤에 강력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이부진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본 이건희 딸 이부진, 그녀의 카리스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대단했다. 곧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을 떠올리게 되었다. 마치 이건희가 내 앞을 걸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야망이란 결국 조금 더 높은 자리를 열망하는 것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구다. 20세기 재즈 뮤지션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위대하게 만든 힘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세 살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불꽃이다. 누군가가 켜놓은 가스난로에서 튀어 오르던 파란 불꽃, 그때 난 세 살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제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그 경험이 그때까지 가본 적 없었던 내 머릿속의 어떤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줬다. 어떤 새로운 경계선으로, 아마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가장자리로 말이다. 바로 거기서 내 인생철학이 시작된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언제나 앞을 향해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는, 그 불꽃의 열기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왔다.”

그렇다. 결국 그를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만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삶 전체에 녹아 있던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부진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가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힘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게 야망으로 번지게 되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불꽃에 온 몸이 타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삶에 대한, 안주에 대한 두려움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야망이 그저 말로만 끝나면 안 될 것이다. 끊임없이 실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하게 될 것이다. 패배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패배를 통해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위안이다.

패배를 감싸주는 지겨운 문장이 하나 있다. “투혼을 앞세워 역공을 가했으나 그들의 밀집 수비는 두터웠다.” 투혼은 실력이 아니다. 결국 투혼을 앞세웠던 것은 실력과 기술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어떻게든 몸으로라도 이겨보려 했던 것이다. 한국 축구가 늘 상대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골을 넣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의 공격수를 허용하지 않은 상대의 수비는 실력이다. 투혼이 아무리 강해도 실력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순 없다.

그러므로 실력이 없어 진 경기에 ‘석패’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태도가 자꾸 자신에게 실력이 쌓이지 않게 만든다. 실력은 자신이 실력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아챈 후에 생기는 것이다. 실력이 없음을 투혼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그야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심산이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정하고, 더 높은 곳에 대한 열망을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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