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현배 시인, 역사 칼럼니스트
 

1974년 2200년 동안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진시황릉 병마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1974년 2200년 동안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진시황릉 병마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진나라 시황제는 13세에 왕위에 올라 38세에 중국 천하를 처음으로 통일한 사람이다. 백만 대군과 1000대의 전차를 이끌고 25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며 이웃 나라들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통일 제국을 처음으로 세운 뒤 그는 ‘왕’이란 칭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칭호가 자기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했다. 그래서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자신이 최초의 황제이니 ‘시황제’라 부르게 한 것이다.

시황제는 각 지방을 제후들에게 다스리게 하는 봉건제를 중앙 집권제로 바꾸었다.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어 중앙 정부가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도량형·화폐·문자 등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황도인 함양에 아방궁을 지었다.

사치와 허영심이 많았던 시황제는 13세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기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살아 있을 때 무덤을 만들면 수명보다 오래 산다는 말이 있었다. 이런 무덤을 ‘수릉’이라고 한다.

지금의 서안 동쪽 여산 기슭에 만든 진시황릉은 공사 기간만 36년이 걸렸다. 총 70여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봉분의 높이만 115m였다. 그 규모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천하를 통일한 뒤에도 전국에서 죄수 70여만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계속했다. 땅을 깊이 파서 구리물을 부어 방수 처리를 한 뒤 외관을 설치했으며, 무덤 내부에는 궁전과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고 여러 진귀한 보물로 가득 채웠다. 또한 침입자가 들어오면 자동으로 발사되는 큰 활을 설치하고, 무덤 주위에 수은으로 크고 작은 강과 바다를 만들어 쉴 새 없이 흐르게 했다. 무덤 천장에는 해와 달과 별을 그려 놓고, 바닥에는 지상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오래도록 꺼지지 말라고 무덤 안을 밝히는 등불의 연료는 인어의 기름을 사용했다.”
 

진시황릉 병마용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진시황릉 병마용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기원전 210년 시황제는 지방 시찰을 다니다가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인 사구평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이 생전에 만들어 두었던 진시황릉에 묻혔다.

무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매장이 끝난 뒤에는 그 일에 참여한 사람들을 무덤 속에 생매장시켰다. 무덤 속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가 단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 뒤로 진시황릉은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항우는 30만명을 동원하여 한 달 동안 무덤 속의 보물들을 약탈했다. 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보물이 있는지 모두 훔쳐가지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2000여년 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그러다가 1974년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2㎞쯤 떨어진 여산 기슭의 서양촌에서 엄청난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세계를 뒤흔든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해 3월 29일 농부 양 페얀과 양 치파는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자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물을 5m쯤 파내려갔을 때 사람 모형의 이상한 물건을 발견했다. 2200년 동안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진시황릉 병마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용’이란 중국 고대 무덤에서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사람 모양의 인형이다. 옛날에는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산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 제도가 있었다. 그들을 모시던 부인이나 첩, 신하들을 산 채로 함께 묻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 시황제는 순장 제도를 없애고 사람 대신 인형을 만들어 묻었다. 그 인형이 바로 ‘용’이다. 서양촌에서 발견된 ‘용’은 병사와 군마를 실물 크기로 만든 인형인 ‘병마용’이었다. 발굴 작업을 하니 지하에는 동서 230m, 남북 62m의 커다란 땅굴이 있었다. 그 안에는 흙으로 구운 6000여개의 병사와 군마들이 전투 대형을 유지하며 늘어서 있었다. 병사들의 키는 평균 1.8m로, 병사들이 입는 긴 웃옷인 전포를 입거나 전포 위에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전투에 나선 듯 칼이나 창, 활을 갖고 있었다.
 

진시황릉 병마용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진시황릉 병마용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말의 키는 평균 1.5m로 병사를 태운 말과 전차를 끄는 말이 있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쏜살같이 달려갈 듯 용맹스러운 모습이었다.

놀라운 것은 모든 병마용이 생김새와 표정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얼굴이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 병사들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1974년 서양촌에서 발굴된 땅굴이 1호 갱이다. 1975년에는 2호 갱, 1976년에는 3호 갱이 발굴되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이 세워졌다.
 

진시황릉 병마용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진시황릉 병마용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4.5

◆ “분서갱유는 어떻게 해서 일어났나요?”

진나라 시황제가 중앙 집권제인 군현제를 시행한 지 8년째 되는 해의 어느 날이었다. 시황제는 함양궁에 신하들을 불러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박사 벼슬에 있던 순우월은 중앙 집권제를 없애고 봉건제로 돌아가자고 건의했다. 그러자 재상인 이사가 말했다.

“봉건제로 돌아가자는 자들은 대부분 선비들입니다. 이들은 옛날 책을 끼고 앉아 사사건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입을 막으려면 이들이 보고 있는 옛날 책들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시황제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관청에서는 옛날 책을 거두어들여 불살라 버리게 했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다.

유생들을 땅 속에 묻어 버린 갱유(坑儒)는 아방궁을 지은 이듬해에 벌어졌다.

시황제는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그래서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초를 구하러 나라 밖에까지 사람들을 보내는가 하면, 신선술에 빠져 신선이 되고자 했다. 신선이 되면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시황제에게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신선의 술법을 닦는 방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후생과 노생은 시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시황제에게 금은보화를 얻고는, 어느 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황제를 신선으로 만들어 줄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일이 잘못되면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평소 시황제를 비난했다는 말까지 들렸다.

시황제는 크게 화가 나서 선비들을 잡아들여 460여명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었다. 이것이 바로 갱유다. 시황제는 분서갱유로 역사에 폭군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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