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자기의 힘만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면, 우방은 물론 적의 역량마저 빌려야 한다. 명무종 주후조(朱厚照)는 황당무계하기로 유명한 황제로 오락에 탐닉해 유근(劉瑾)을 비롯한 8명의 환관들을 중용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팔호(八虎)’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유근이 가장 악랄하고 술수에 능했다. 유근은 조정의 대권까지 장악하며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당시 사람들은 주황제와 유황제라고 비웃었다. 유근은 자기를 방해하는 내각대학사 유건(劉健) 등 53명을 간당(奸黨)으로 정하고 금수교(金水橋) 남쪽에서 무릎을 꿇고 훈계를 듣게 했다. 대신들은 분노했지만 그를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1510년, 안화왕(安和王) 주진번(朱眞鐇)이 반란을 일으키자, 무종은 도어사 양일청(楊一淸)에게 토벌하게 하고, 태감 장영(張永)을 감군으로 삼았다. 장영은 유근과 함께 ‘8호’에 속했지만, 유근의 발호에 불만을 품었다. 출정할 때 무종은 친히 융복을 입고 동화문까지 나가 송별하며 총애를 표시했다.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주진번은 이미 사로잡혔다. 양일청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지략가였다. 그는 장영이 유근과 사이가 벌어진 것을 이용해 유근을 제거하려고 생각했다. 양일청이 장영에게 말했다.

“종실의 반란은 공의 힘으로 평정했습니다. 외부의 혼란은 제거하기가 쉽지만, 국가 내부의 혼란은 어떻게 마무리할지 모르겠습니다.”

양일청은 손바닥에 ‘근(瑾)’이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주었다. 장영이 머뭇거리자 양일청이 다시 설득했다.

“황상은 공도 신임하므로 반란을 평정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번에 대공을 세웠으니 조정으로 돌아가 황상과 반란평정에 대한 일을 토론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유근의 죄악을 폭로하시고 황상의 심복들로 인한 변고가 발생할까 두렵다고 하십시오, 황상은 영명하시니 반드시 공의 의견에 따라 유근을 주살할 것입니다. 유근으로 인한 폐정을 바로잡고 천하의 인심을 수습하면 공은 이름을 천고에 드리울 것입니다.”

장영은 양일청의 말에 고무돼 황상의 은덕에 보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장영이 첩보를 고하고 포로를 바치겠다고 말하자, 유근은 기일을 늦추라고 명했다. 장영은 재빨리 입경해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개최했다. 황제는 잔치를 열어 장영을 위로했다. 유근도 배석했다. 밤이 깊어지자 유근이 먼저 물러났다. 장영은 주진번이 반란을 일으키며 유근을 통렬히 비난한 격문을 황제에게 보여주었다. 대취한 무종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근이 나를 배반했다고 중얼거렸다. 장영은 머뭇거릴 일이 아니라고 진언했다. 진작부터 유근에게 불만이 많았던 마성도 즉시 옆에서 거들었다. 무종은 한밤중에 유근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다음날 아침, 무종은 내각대신들에게 장영의 보고서를 공개하고 유근을 유배했다. 무종이 직접 유근의 가산을 몰수했다. 위조된 옥새와 소유가 금지된 물품도 나왔다. 유근이 매일 들고 다니던 부채에 두 자루의 비수를 숨겼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무종은 진짜 자기를 배반했다고 노발대발하며 유근을 하옥시켜 조사하고 능지처참하라고 명했다. 그의 가족과 당원들도 모두 주살됐다. 유근은 무종이 태자로 있을 때부터 측근에서 시봉했다. 무종이 계위하자 더욱 총애를 받았다. 권력을 이용해 사당을 결성했다. 올곧은 대신들이 유근을 제거하려고 해도 사실상 어려웠다. 그러나 양일청은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지만 유근과 틈이 벌어진 장영과 함께 주진번의 반란을 평정하게 된 기회를 이용했다. 우선 그의 호감을 받은 후, 감정과 이성을 동원해 장영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었다. 유근이라는 가지가 많은 큰 나무가 한 순간에 쓰러졌다. 환관을 이용해 환관을 제거했으니 절묘한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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