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71주년] 국가 폭력 희생양 ‘제주도민 넋’ 위로할 그날을 바라보다
[제주4.3사건 71주년] 국가 폭력 희생양 ‘제주도민 넋’ 위로할 그날을 바라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팔에 남겨진 총상을 보여주고 있는 오인권 할아버지. (출처: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팔에 남겨진 총상을 보여주고 있는 오인권 할아버지.

해방 후 좌우대립 ‘슬픈 역사’

미군, 최소 3만 최대 8만 사망

참여정부 국가차원서 첫 사과

4.3특별법 개정안 2년째 계류

“후손들 떳떳하게 살게 해달라”

“미국 책임 묻고 사과 듣고파”

[천지일보=박준성·이대경 기자] 70여년 전 국가에 의해 수 만명의 무고한 제주 양민이 학살을 당했던 ‘제주 4.3사건’에 대해 유가족이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그날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족의 증언을 들어보고, 해법을 찾고자 4.3사건을 되돌아봤다.

해방 후 제주서 일어난 대참극…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4.3사건은 일제패망 후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경찰 간의 충돌로 촉발됐다. 이후 이승만 정권과 미국 정부에 의해 벌어진 ‘초토화 작전’으로 당시 제주도민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 정도가 희생당한 사건이다.

남로당은 미군정의 폭정을 기회로 삼아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선동해 일을 벌였다. 그러나 남로당 지도부들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동안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며 제주도를 빠져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제주도에 남은 무장대 역시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즉 4.3사건은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이승만 정권, 미군정, 남로당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건으로 봐야 한다.

4.3사건 당시 제주농업학교에 수감된 제주사람들 (제공: 제주4.3희생자유족회)
4.3사건 당시 제주농업학교에 수감된 제주사람들.

◆제주 4.3사건의 전개 과정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삼일절 기념행사를 마친 후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어린아이의 사망 사건으로 인해 경찰이 시민들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있게 되고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 합동 파업이 진행됐다. 총파업에는 미군정에서 일하던 인원, 경찰 등도 동참해 유례없는 합동 파업이며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측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곳 중 12곳과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습격해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의 비극이 시작됐다. 남로당 무장대는 주요 거점을 치고 빠지는 형식의 전술을 취해 소위 ‘빨치산’이라 불렸다.

이들이 산으로 도망 다니면서 쉽게 토벌되지 않자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진압을 시행했다. 당시 토벌대 중에서 가장 악랄한 평가를 받은 단체는 ‘서북청년회’와 소속 대원이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좌익과 연관돼 있다”며 무참히 학살했다.

초토화 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됐다. 학살 행위는 군경토벌대 뿐 아니라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이유로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하고 끝나갈 무렵 무장대가 대부분 토벌됐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며 무고한 양민 학살의 대참극의 총성은 멈췄다.

불타는 오라리 마을: 미군이 촬영한 불타는 오라리 마을. (출처:제주 4.3희생자 유족회)
불타는 오라리 마을: 미군이 촬영한 불타는 오라리 마을.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보는 관점

미군 G-2 보고서와 CIC 보고서 등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 중 80% 이상이 토벌대에게 죽은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에서 제주 4.3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좌익과 우익 사이의 이념전쟁으로 보는 것이 주를 이뤘다. 대한민국 정부, 학계, 보수, 극우세력은 폭동과 반란에 초점을 두었지만 진보계열에서는 민중항쟁으로 봤다.

최근 4.3사건에 대한 시각은 당시 발생한 학살에 주목해 제노사이드 혹은 국가에 의한 폭력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는 관점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4.3 사건을 정치적 사건이 아닌 우파와 좌파의 이념싸움 현장에서 제주도민들만 학살당한 사건이라는 것에 논점을 두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을 통해 입은 인명 피해는 2만 5000~3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 마을의 95%(가옥 3만 9285동) 이상이 없어졌다.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1만 4233명(2017년 기준)에 이른다.

중산간지대에  피신한 제주사람들 (제공: 제주4.3희생자유족회)
중산간지대에 피신한 제주사람들.

◆국가 차원 진상조사·사죄

정부 수립 70여년의 세월 동안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노근리 학살사건이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4.3사건의 진상규명이나 보상은 매우 미미하다. 노태우 정권까지 유가족에 대한 경찰의 사찰 등이 이뤄졌다. 이후 문민정부 김대중 정부를 지나 참여정부에 이르러서야 국가에 의해 진상조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추모와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시민단체와 유가족들의 노력으로 1999년 12월 16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우여곡절 끝에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2000년 1월 12일 ‘제주 4.3사건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 공포됐다. 이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가 발족됐고,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면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건이 일어난 지 55년 만에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사과를 했다. 이후 2005년에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4.3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가 이뤄졌다. 지난 2014년에는 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됐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에서 치른 4.3사건 70년 기념식에서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며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라며 “국가 차원에서 유해 발굴 사업, 배상과 보상, 국가 트라우마센터 건립 등을 국회와 논의해 추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4.3사건 희생자와 유족에대한 배·보상 등을 골자로 한 제주 4.3특별법 개정안은 국회에 2년째 계류 중이다. 원희룡 제주자치도지사는 1일 국회의원 전원에게 4.3특별법 개정안 처리를 요청하는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공문에는 4.3 특별법이 좌우 이념을 떠나 화해와 상생을 위한 것이기에 조속한 처리를 힘써달라는 뜻이 담겼다.

2008년 제주공항 활주로 옆에서 무더기로 발굴된 4.3유해. (출처: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2008년 제주공항 활주로 옆에서 무더기로 발굴된 4.3유해.

◆진상규명·명예회복… “美에 ‘미안하다’ 듣고 싶다”

제주 4.3사건의 희생자인 송승문 제주 4.3 희생자유족회장은 사건이 발생하고 1년 뒤인 1949년 수용소였던 주정공장으로 만삭인 채 끌려온 그의 어머니를 통해 태어났다.

송 회장은 3대째 그 고통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됐다. 할머니도 행정 실수로 전주형무소에서 10개월이나 형을 살아야 했다.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계속 붙어 그의 삶을 옥죄었다.

송 회장은 “빨갱이 자식, 폭도 자식이라고 듣기도 했다. 일본으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가족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남았다”면서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아직도 남아 있어 억울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4.3사건이라는 이름은 진상조사를 위한 하나의 명칭일 뿐이다. 후대에 떳떳한 항쟁으로, 이름을 붙여서 전시관에 있는 백비(白碑, 비문이 없는 비석)를 세웠으면 좋겠다”면서 국가에 진상규명과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보상을 필요하다고 했다.

송 회장은 “사건 당시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이었기에 미국에 책임을 묻고,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듣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평화공원 위령제단 내부 비석. (출처: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평화공원 위령제단 내부 비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