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군서면에 있는 왕인박사유적지 전경. (제공: 영암군) ⓒ천지일보 2019.3.29
영암 군서면에 있는 왕인박사유적지 전경. (제공: 영암군) ⓒ천지일보 2019.3.29

영암 왕인박사유적지

영암 구림마을 출신 왕인박사
공부했던 책굴·문산재·양사재
벼슬하지 않고 제자들 가르쳐
 

응신천황 초대로 일본으로 가
천자문·기술 등 일본에 전수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기여
일본에선 학문의 신으로 모셔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왕인박사는 한자와 문화를 처음 일본에 전해 일본 아스카 문명을 일으킨 백제 근초고왕 때 인물이다. 그가 ‘박사’라 불리는 이유는 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등 경서에 능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경박사’라 존경을 받은 그는 일본에 초빙돼 일본의 문명을 계발하고 지도해 일본 문화발전에 기여했다. 왕인박사는 박사임에도 벼슬보단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 바쳤다.

◆ 왕인박사의 흔적을 찾아

현재 왕인박사와 관련된 사적지는 왕인박사 탄생지인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동 일대의 ‘왕인박사유적지(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20호 1976년)’와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시의 ‘왕인박사 묘소(오사카부 사적 제13호 1938년)’가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왕인박사가 공부한 책굴 앞에 후대인들이 왕인박사의 후덕을 기리기 위해 조각한 왕인 석상. (제공: 영암군) ⓒ천지일보 2019.3.29
왕인박사가 공부한 책굴 앞에 후대인들이 왕인박사의 후덕을 기리기 위해 조각한 왕인 석상. (제공: 영암군) ⓒ천지일보 2019.3.29

기자는 지난 27일 영암에 있는 왕인박사유적지를 찾았다. 이곳에는 박사의 생가터와 박사가 마셨다는 성천(聖泉)이 남아 있다. 또 월출산 중턱에는 박사가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책굴(冊窟)과 문산재(文山齋)·양사재(養士齋)가 있다. 책굴 앞에는 후대인들이 왕인박사의 후덕을 기리기 위해 조각한 왕인 석상이 있다. 

정희봉 해설가는 “왕인박사기념전시관이 있는 영월관에도 월출산에 있는 왕인 석상을 본떠 만든 것이 있는데 상반신만 보고 ‘부처’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아래를 보면 학자들이 입었던 관복이어서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월관에 있는 왕인박사기념전시관에는 박사가 일본으로 간 여정을 따라 지난 2001년 4월 왕인박사문화전파뱃길 탐사단이 무동력 뗏목으로 탐방할 때 사용한 돛, 왕인박사가 살았던 백제 시대의 유물, 그의 생애와 업적 등에 대해 볼 수 있다.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왕인박사유적지 영월관 앞에 있는 천인천자문. ⓒ천지일보 2019.3.29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왕인박사유적지 영월관 앞에 있는 천인천자문. ⓒ천지일보 2019.3.29

◆ 왕인박사가 가져간 천자문

영월관 앞에는 ‘천인천자문’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천인천자문은 5세기 초 천자문을 비롯해 백제의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한 왕인박사의 인류 공동번영의 업적을 기리고 박사가 남긴 ‘소통과 상생’의 정신을 널리 세계 평화 디딤돌로 삼기 위해 한국·중국·일본의 명사 1000명이 육필로 천자문을 한자씩 기록하고 이를 다시 석공이 돌로 새겨 만든 것이다.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정희봉 해설사가 왕인박사유적지 영월관 앞에 있는 종요천자문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천지일보 2019.3.29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정희봉 해설사가 왕인박사유적지 영월관 앞에 있는 종요천자문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천지일보 2019.3.29

정희봉 해설가는 “왕인박사가 가져간 천자문에 대해 주시할 필요가 있다”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주흥사 천자문으로 만들어진 시기가 6세기 초여서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왕인박사가 가져간 천자문은 이보다 200여년 앞선 ‘인의일월 운로엄상(仁儀日月 雲露嚴霜)’으로 시작하는 종요천자문”이라고 강조했다. 

천인천자문 옆에 있는 종요천자문 비 내용에 따르면 종요천자문은 3세기 초엽 위나라 태위(太尉)였던 종요(鍾繇)가 만든 천자문이다. 또 여러 가지의 천자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라 왕인의 실체와 연관 지어 다른 생각도 가질 수 있어 비를 세운다는 등의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 특이하게 종요천자문 비석에는 ‘○’ 표시가 있는데 이는 아직 해석이 안 된 것이라 한다.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고향을 뒤돌아봤다는 돌정고개. ⓒ천지일보 2019.3.29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고향을 뒤돌아봤다는 돌정고개. ⓒ천지일보 2019.3.29

◆ 일본 학문의 신이 된 왕인박사

왕인박사는 응신천황의 초대를 받아 일본으로 가게 된다. 현재는 영산강 하굿둑으로 바닷길이 막혔지만, 당시에는 상대포라는 국제무역항이 있을 정도로 영암군은 무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왕인박사는 상대포를 통해 일본으로 떠났다. 정희봉 해설가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고향을 뒤돌아봤다는 돌정고개를 소개하며 “지금의 지형으로 보면 안 된다. 월출산 아래까지 물이 들어왔는데 이 길만 돌아서면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떠난 왕인박사는 일본 문헌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계11권의 전적을 가지고 가 응신천황의 왕자들을 가르친 사부가 됐으며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제반의 제도를 마련하고 직접 그 시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왕인박사 생가터. 초석이 남아있다. ⓒ천지일보 2019.3.29
[천지일보 영암=김미정 기자] 왕인박사 생가터. 초석이 남아있다. ⓒ천지일보 2019.3.29

또 외교문서의 해독과 작성 등 응신정권의 대국화, 고대국가 형성에도 기여했으며 한자를 이용해 일본의 문자(萬葉假名)를 창안해 문화와 학문의 조상이라는 자리까지 오른다. 고향을 떠나 멀리 타국에서 문명을 깨우고 가르치는 일을 왕인박사는 어떤 심정으로 했을까. 

또 다른 문화해설가인 강학용씨는 “지난 2018년 일본 사가현 간자키시에 왕인박사현창공원과 백제문, 천인천자문비, 정보교류관 등이 세워졌는데 시공을 초월해 관계를 이어가고 국적을 떠나 친구라는 감회에 왕인박사의 상생 정신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왕인박사가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책굴. (제공: 영암군) ⓒ천지일보 2019.3.29
왕인박사가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책굴. (제공: 영암군) ⓒ천지일보 2019.3.29

일본에는 왕인박사를 학문의 신으로도 받들고 있다. 정희봉 해설가는 “우리나라 인물이 일본의 신이 된 것”이라며 “학업의 향상과 입시의 합격을 기원하는 참배객이 많다”고 전했다. 

‘해신의 바다와 수많은 흰 파도를 넘고 넘어서 여덟 섬나라에는 글이 전해졌노라’고 왕인박사를 칭송하는 일본 천황의 글을 통해 진정한 상생 정신을 위해선 희생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편 영암에서는 오는 4월 4일부터 7일까지 영암 왕인박사유적지에서 ‘왕인문화축제’를 연다. 왕인박사의 정신과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족과 함께 찾아보길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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