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모란이 피고 지는 계절이 또 왔는데
[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모란이 피고 지는 계절이 또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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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신라 선덕여왕은 당나라 태종이 보내 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선,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 했다. 함께 보내온 꽃씨를 심어 그 꽃이 피기를 기다려 살펴보니 과연 향기가 없었다. 꽃에 향기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신하들이 묻자, 그림에 나비가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선덕여왕은 당 황제가 과부인 자신의 처지를 조롱했다며 분개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선덕여왕이 총명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선덕여왕이 그림 보는 법을 몰라 벌어진 우스꽝스러운 일화라는 말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를 통해 비유로 그 뜻을 담았는데, 동음이의(同音異義)랄 수 있는 해음(諧音)을 이용한 것이다. 박쥐 그림은 복을 많이 받으란 뜻으로, 박쥐 복(蝠)과 복 복(福)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박쥐 다섯 마리를 그려 넣으면 다섯 가지 복, 즉 오복(五福)을 받으란 뜻이다. 물고기 그림도 마찬가지로, 물고기 어(魚)는 넉넉할 여(餘), 풍요할 유(裕)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다.

나비 접(蹀)과 노인 질(耋)도 중국어로는 ‘디에’로 발음이 같다. 때문에 모란에 나비를 같이 그려 넣으면 노인이 될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의 노인 질(耋)은 60에서 80살 정도를 의미한다. 고양이 묘(猫)는 노인 모(耄)와 중국어 발음이 ‘마오’로 같은데, 노인 모(耄)는 80살 이상 노인을 뜻한다. 모란과 고양이가 함께 있는 그림은 그래서 80~90세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것이다.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었던 것은, 선덕여왕이 60에서 80세까지만 아니라 그 이상 오래 잘 살라는 뜻을 담은 것일 수 있다. 만약 모란에 고양이와 나비를 함께 그려 넣어 아흔까지 잘 살라는 뜻을 확실히 담았으면 좋았을 텐데, 당 태종의 진심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당 태종은 선덕여왕을 우습게보고 업신여겼다. 유교 가부장제 의식이 강했던 당 태종은 여성이 왕이 된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신라의 사신에게 “부인(婦人)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다”며 자신의 친족을 보내 신라 임금으로 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덕여왕이 모란 그림을 보고 발끈한 것은 그림 보는 법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반대로 이런 당 태종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당 태종의 모란 그림이, 자신이 비록 왕이지만 남편 없는 과부인데다 여성이라는 점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수 있다.

선덕여왕 때만 해도 왕이 무장을 하고 말을 타고 나가 전쟁을 이끌던 시기였다. 이웃국가인 백제 고구려와도 끊임없이 충돌하던 불안정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여왕 노릇하기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당 태종의 사주로 반란이 일어났고, 그 혼란을 이기지 못해 재위 16년 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득한 시절 그런 일이 있었고, 또 모란이 피고 지는 계절이 왔다. 해 아래 새로운 것 없다 하였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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