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장흥=전대웅 기자]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 모습. 좌측 대문 앞에 안중근 의사 사당이라는 작은 팻말이 있다. ⓒ천지일보 2019.3.26
[천지일보 장흥=전대웅 기자]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 모습. 좌측 대문 앞에 안중근 의사 사당이라는 작은 팻말이 있다. ⓒ천지일보 2019.3.26

안씨 문중에서 약 60년간 추모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일

이승만 박사, 해동명월 직접 써

군 “해동사 교육 중심 場 만들 것”

[천지일보 장흥=전대웅 기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나의 시신은 독립이 되기 전까지 조국 땅에 묻지 마라.”

독립운동가인 도마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남긴 유언 중 일부분이다. 나라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울 남산 인근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어 그의 업적은 한눈에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를 잇고자 하는 이들이 세운 것이다. 하지만 독립이 돼도 그의 유골은 조국의 품으로 오지 못했다. 남북이 갈라져 아직 통일되지 못해서일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의(義)를 장흥의 안씨 문중에서 이어오고 있었다.

◆어머니 만든 수의 입은 진정한 영웅

안중근 의사는 1897년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나 6살 무렵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해 조부인 안인수씨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다. 아직은 어린 나이인 16살임에도 부친 안태훈 진사가 조직한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출전해 용맹을 떨쳤다. 19살에 부친을 따라 천주교에 들어가 교리를 배우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유교적 소양과 개화기식을 바탕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토대로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돼 여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는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며 수의와 함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대로 안중근은 어머니가 지어준 수의를 입고 순국한 진정한 영웅이다. 당시 간수들은 그의 정신과 당당함에 감복했다고 한다.

[천지일보 장흥=전대웅 기자] 전남 보성 향교 앞에서 안종덕 회장이 안중근 의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3.26
[천지일보 장흥=전대웅 기자] 전남 보성 향교 앞에서 안종덕 회장이 안중근 의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3.26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마을에 있다. 해방된 이후 안중근 의사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없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죽산 안씨 문중의 안홍천옹이 장흥의 유림과 협의해 문중에서 조상들 제사를 지내며 안 의사의 제도 같이 모셔왔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날은 3월 26일이지만 조상과 같이 제를 모시는 까닭에 음력 3월 12일에 추모행사를 치른다. 안종근(75, 남, 안씨 문중회장)씨는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문중과 유림, 협의체에서 논의해 내년부터는 순국한 날인 3월 26일에 추모행사를 진행할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로 해동명월이라고 쓰여 있다. (제공:장흥군) ⓒ천지일보 2019.3.26
안중근 의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로 해동명월이라고 쓰여 있다. (제공:장흥군) ⓒ천지일보 2019.3.26

◆해동명월(海東明月) ‘동쪽을 밝힌다’

안홍천옹은 1955년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안종근씨는 “안홍천옹이 한복 입고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께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의를 기리기 위해 도와달라고 했다”며 “그때 이승만 전(前) 대통령이 ‘해동명월(海東明月)’이란 글을 직접 써줬다”고 했다. 그는 “해동명월이라고 하면 동쪽을 밝힌다는 뜻”이라며 “대한민국을 밝히고 세계를 밝힌다는 말과 같다”고 설명했다. 안씨 문중에서는 해동명월이라는 글을 가지고 돌아와 유림과 논의해 사당을 짓고 그 이름을 해동사라 칭했다. 처음 사당을 지을 땐 5㎡ 정도 되는 작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장흥군에서 작게나마 도움을 줘 지금은 제법 모양은 갖췄지만 60여년의 세월을 보낸 까닭에 초라한 모습도 보인다. 해동사를 올라가는 길도 차 한 대가 겨우 올라갈 정도로 비좁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곳을 찾는 참배객이나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흥군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해동사를 후손·후학들에게 국가관과 민족관을 고취하는 교육 중심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안종근씨는 “강진, 장흥, 보성에 있는 안씨 형제가 안중근 의사의 의를 기리기 위해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고 해동사를 관리해 왔다”며 “이 계기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 의를 많은 사람이 계승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천지일보 장흥=전대웅 기자] 1955년 처음 지어진 사당에 세월이 흘러 노후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놓여 있다. ⓒ천지일보 2019.3.26
[천지일보 장흥=전대웅 기자] 1955년 처음 지어진 사당에 세월이 흘러 노후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놓여 있다. ⓒ천지일보 2019.3.26

◆안중근 의사가 집필한 책

안중근 의사가 집필한 책은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이 있다. 그가 사형언도를 받기 전날부터 93일 동안 자신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 안응칠 역사다. 원본은 안타깝게 발견되지 못했지만, 사본과 번역본이 순국 60년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됐다. 1979년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 자료실에 보관 중인 시치조문서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 합본이 발견됐다.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일본어 등사본으로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안 의사가 옥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한 ‘동양평화론’은 국권 회복 운동을 하면서 세운 지표(指標)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다. 안종근씨는 “안중근은 옥중에서 다른 사람에게 글을 써준 것을 간간이 볼 수 있다”며 “옥살이하면서 간수에게 글을 써줄 정도다. 넓은 포용력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가 집필한 원본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고 한숨을 쉬며 토로했다. 해동명월이란 말처럼 대한민국을 비추는 빛이 평화의 물결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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