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금성관. 지방 궁궐로 나주를 찾는 손님들이 머물던 곳으로 객사라 칭했다. 1337년(공민완 22년)에 창건한 건물로 현재의 금성관 원형은 성종 6~10년(1495~ 1479)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이유인이 지었다. ⓒ천지일보 2019.3.25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금성관. 지방 궁궐로 나주를 찾는 손님들이 머물던 곳으로 객사라 칭했다. 1337년(공민완 22년)에 창건한 건물로 현재의 금성관 원형은 성종 6~10년(1495~ 1479)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이유인이 지었다. ⓒ천지일보 2019.3.25

천년고도 지방궁궐 금성관부터

서부고샅길 역사 스토리 많아
서성벽 흙돌담 정겨운 옛 풍경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계속된 미세먼지, 봄비도 그치고 산책하기에 좋은 봄이 왔다.

22일 기자는 나주의 진산 금성산 자락 아래 위치한 나주읍성을 찾았다. 이날 나주를 대표하는 금성관은 물론 나주읍성 고샅길과 돌담길 곳곳은 매화, 개나리, 수선화 등 각종 들꽃이 피어 완연한 봄 날씨를 보였다.

‘나주’를 방문한 이는 일단 ‘나주곰탕’을 맛본다. 국물이 맑고 고기가 부드러운 것이 특징인 나주의 별미 곰탕을 먹고, 자연스레 발걸음은 금성관을 향했다.

금성관은 1373년에 금성군의 정청(政廳)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한 곳이다. 금성관이 가장 빛날 때는 지방 궁실의 역할을 할 때였다. 나주목을 찾는 손님들이 묵었던 곳으로 나주객사라고도 한다. 매월 1일과 15일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는 장소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가 모셔져 있어 나주지역 자부심의 상징인 곳이다.

천년목사고을인 나주시의 시작점인 이곳은 역사만큼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

그러나 정작 나주읍성의 역사와 주민의 삶과 추억을 엿보고, 조선 시대의 옛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나주고샅길(서부길과 동부길)의 매력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서부길에 있는 이화맨션. 세계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의 저자 최부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천지일보 2019.3.25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서부길에 있는 이화맨션. 세계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의 저자 최부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천지일보 2019.3.25

 서부길은 조선 시대 서부면에 해당하는 길이며, 조선 향리들이 살던 전통동네를 걸어서 둘러보는 약 3㎞ 코스로 1시간~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동부길은 조선시대 동부면에 해당하는 길로, 주로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약 5㎞ 코스로 2시간 소요되는 자전거 코스다.

기자는 금성관에서 시작되는 서부길을 택해 정수루, 목사내아 금학헌, 제칠일안식일교회, 최부와 양부자 집터, 보리마당거리, 서성벽길, 나주향교, 난파고택, 이로당 등을 들렀다.

금성관을 둘러본 뒤 정수루로 이동했다. 시계가 없던 시절, 시간을 알리고 관청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갓끈을 새로 매며 정결하게 하던 곳이 정수루다. 또한 백성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 역할도 했다. 오늘날엔 나주인들이 주요 행사에서 북을 두드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정수루 옆에는 나주를 소개하는 나주목문화관이 있고 큰 잔디광장 앞에는 목사내아가 있다. 목사내아는 조선 시대 관아이고, 금학헌(琴鶴軒)은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이란 뜻으로 나주목사가 거주했던 내동헌(살림집)이다.

나주시 관계자는 “지난 2009년 5월부터 숙박 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거듭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목사내아에서 잠을 자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일화가 있으며, 오래된 팽나무와 호두나무, 벚나무도 시선을 모았다.

목사내아 오른쪽엔 나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있었다.

교회를 지나 근처 이화맨션 입구부터 본격적으로 고샅길(좁은 골목)이 시작됐다. 이화맨션은 세계 3대 중국기행문 ‘표해록’의 저자 최부가 살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나주 서부길 내 보리마당 가는 길. 보리를 추수해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타작하던 골목마당으로 주민들의 추억이 서린 길이다. 오래된 흙담장이 잘 보존돼 있다. ⓒ천지일보 2019.3.25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나주 서부길 내 보리마당 가는 길. 보리를 추수해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타작하던 골목마당으로 주민들의 추억이 서린 길이다. 오래된 흙담장이 잘 보존돼 있다. ⓒ천지일보 2019.3.25

이어진 길엔 나주 고샅길의의 특징을 보여주는 궁궐 돌담과 보리마당길이 나타났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 김진수(가명, 70대)씨는 “늦은 봄에 보리수확이 끝나면 여기서 탈곡을 했다. 지게로 달구지로 가져와 실어온 보리 낟가리가 장관을 이뤘다”고 회상했다.

보리마당길은 고샅길 중 ‘길고 길어서’ 붙여진 이름인 ‘징고샅길’과 연결되고, 서성벽길·서성문으로 가는 길과 연결돼 있었다.

서성벽길에 들어서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제대로 보존돼 있진 않았지만 군데군데 아직 남아있는 낮은 흙담길과 따닥따닥 붙어있는 집들,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옛 풍경이었다.

길가에 핀 풀꽃, 흙담의 담쟁이를 카메라에 담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서성문 앞에 도착했다.

서성문은 나주읍성 4대문중 하나로 지난 2014년 7월 개봉한 영화 ‘군도(群盜)’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나주 동학사에도 매우 중요한 곳으로 당시 향리층은 유림과 의병봉기의 주도세력으로 나서 나주읍성을 지켜냈다. 동학농민군의 수장 전봉준이 나주목사 민종렬과 협상했던 역사적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나주읍성 4대문 중 하나인 서성문으로 가는 길. 서성문(영금문)은 2007년 발굴조사 결과 지하에 유적이 잘 남아있어 제 모습을 찾아 2011년에 복원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이 영금문으로 찾아와 나주목사였던 민종렬과 협상했던 역사 현장이다.ⓒ천지일보 2019.3.25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나주읍성 4대문 중 하나인 서성문으로 가는 길. 서성문(영금문)은 2007년 발굴조사 결과 지하에 유적이 잘 남아있어 제 모습을 찾아 2011년에 복원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이 영금문으로 찾아와 나주목사였던 민종렬과 협상했던 역사 현장이다.ⓒ천지일보 2019.3.25

기자는 계속해서 조선 시대 성균관 다음으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전묘후학의 배치가 특징인 나주향교와 조선 말기의 동학 의병장, 정석진의 손자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한·일·양 근대건축 양식의 난파고택을 따라 걸었다.

이 밖에도 향교 주변에는 생원과 진사를 뽑던 사마시(司馬試)를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정진하던 곳인 사마재(사마재길)과 명당(明堂)터, 곡식 창고가 있던 광장과 골목인 사창 거리, 길이 좁아 붙여진 이름인 연애고샅길 등이 구불구불 연결돼 있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출발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이로당의 소나무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로당(노인정)의 소나무는 400년 된 해송으로 용트림하며 하늘을 향해 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서부길 곳곳에 오래된 나무가 많지만 유독 푸르른 기상이 돋보여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이로당 소나무. 400년된 해송으로 하늘을 향해 용트림하는 형상으로 자라고 있다. ⓒ천지일보 2019.3.25
[천지일보=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이로당 소나무. 400년된 해송으로 하늘을 향해 용트림하는 형상으로 자라고 있다. ⓒ천지일보 2019.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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