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북한에게 묻고 싶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 중 과연 현 문재인 정부보다 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한 정부가 또 있었는지를 말이다. 이해를 넘어 ‘수석대변인’이란 비난까지 받고 있지 않는가. 지난해 5월, 북한과 미국의 제1차 정상회담이 결렬위기에 놓였을 때 제일 먼저 판문점으로 김정은을 불러 훈시한 지도자가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휴전선의 GP가 폭파되고 유해발굴을 위해 남북도로가 관통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역사적 진전이 아니다.

그런데 북한은 왜 이러는가. 그야말로 “하노이에서 뺨맞고 판문점에 와 주먹 휘두르는 격”이 아니냐 이 말이다. 평양이 입만 벙긋하면 주절대는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색 바랜 구호로 전락해 허무함만 안겨주는 ‘남의 민족제일주의’로 퇴색돼 가고 있다고 하면 좀 심한 표현인가. 

북한은 지난 22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개성의 남북연락사무소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북쪽 인력 15명은 이날 오전 간단한 서류만 챙긴 뒤 장비를 남겨둔 채 홀연 연락사무소를 떠났다. 북한이 남북협력의 요람인 연락사무소에서 이런 식으로 갑자기 철수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측 인원의 철수는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북측이 없는 연락사무소는 무의미하다. 뭐 우리 측 인원들이 남아 불이나 때면서 사무실을 지켜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연락사무소냐 말이다. 하노이에서 굴욕적인 대실패를 경험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20일이 넘도록 심사숙고한 대책이 겨우 우리 민족끼리 마련한 공동연락사무소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라면 북한은 아직 정상국가로 가기에는 한창 멀었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북한의 연락사무소 철수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계속돼온 북-미 대치의 불똥이 남북관계에까지 옮겨 붙은 결과로 보인다. 북-미는 하노이 결렬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며 압박과 비판의 강도를 높여왔다. 급기야 지난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협상 중단을 고려한다’는 강경한 발언을 내놓기까지 했다. 이런 대치 와중에 미국 국무부는 북한의 제재 회피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는 중국 해운사 두 곳을 독자 제재 명단에 올렸다.

백악관의 볼턴 보좌관은 “재무부는 북한의 불법 해상 운송을 중단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압박 강도를 높였다. 미국이 하노이 결렬 이후 3주 만에 독자 제재에 나선 것이 북한에는 전방위적 압박 신호로 비쳤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연락사무소 철수는 마땅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런 압박 상황에서 일단 판을 흔들고 보자는 차원의 전형적인 몽니행동으로 보인다. 남쪽 정부가 북-미 사이를 중재하기보다는 미국과 함께 제재 압박에 동참하고 있다는 판단도 이번 철수의 배경이 됐을 가능성도 있다. 최 부상이 지난주 외신 회견에서 한국 정부를 ‘미국 쪽에 선 플레이어’라고 지적한 데서 북한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남북협력으로 북-미 협상의 돌파구를 찾기도 어렵고 남북관계의 진전을 기약하기도 쉽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연락사무소 철수라는 강경 조처를 단행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방적 철수는 남북관계를 위기에 빠뜨리는 악수일 뿐이다. 북-미 협상 교착 문제는 그것대로 풀어야지, 남북협력의 교두보를 흔드는 방식을 쓰는 것은 무모함의 극치다.

왜 미국에 대한 불평불만을 남북관계 발전과 북-미 협상 진전을 위해 정성스럽게 노력해온 우리 정부에게 퍼붓는단 말인가. 이런 식의 판단이 말 그대로 상부, 즉 김정은 위원장의 판단인지 묻고 싶다. 정녕 김정은 위원장의 식견과 혜안이 이 정도라면 북한은 애당초 ‘정상국가’가 되기에 아직 한참 멀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남북연락사무소는 남북협력의 상징이며 공동의 결실이다. 연락사무소 철수는 남북 어느 쪽에도 도움이 안 되는 일종의 자해행위이며 통일의 길에 또 다른 지뢰밭을 조성하는 위험천만한 좌충수다. 북한은 철수 결정을 즉각 재고해 사태를 원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평양으로 불러들인 연락사무소 직원들을 현장에 복귀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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