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모습 ⓒ천지일보DB
북악산 모습 ⓒ천지일보DB

한양 둘러싼 천연 요새 ‘내사산’
수려한 자연, 산수화 속에 담아
조선과 근대유적 공존하는 곳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만물이 깨어나는 ‘경칩(驚蟄)’이 지나고 색색을 자랑하는 꽃봉오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그야말로 삼라만상이 눈뜨는 어엿한 봄이 찾아온 것이다.

예로부터 산세가 아름다웠던 우리나라의 경우 산은 역사와 문화가 담긴 삶의 터전이었다. 대표적으로 서울에는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이 있다. 내사산이란 한양도성의 성곽이 지나는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 일대를 말한다.

최근 서울역사편찬원이 올해 서울역사답사 지역을 내사산으로 선택할 만큼 산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내사산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천연의 요새 인왕산

먼저 내사산 중 하나는 인왕산으로, 조선의 명산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다. 인왕산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이곳에 인왕사(仁王寺)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왕산 자락에는 조선시대 근대유적이 남아있다. 인왕산의 선바위는 서울 명칭 유래를 담고 있는 곳이다. 과거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품자고 했고 정도전은 서울 도성 밖에 두자고 했다. 이를 고민하던 이성계는 눈내린 인왕산을 보기 위해 정도전과 나섰는데, 그때 선바위 안쪽은 눈이 녹았고 선바위는 눈이 녹지 않았다. 이에 선바위는 성 밖에 두기로 했다. 이 같은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됐다.

특히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울타리, ‘설울’이라고 하다가 서울로 바뀌게 됐다. 인왕산 자락은 조선시대 사신길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국영 여관인 ‘홍제원(洪濟院)’이 있었다. 홍제원은 서대문 밖에서 무악재를 넘으면 동편에 위치했다. 도성과는 가장 가까운 의주로상의 첫번째 원이어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많이 이용했다. 1895년(고종 32)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다. 인왕산 기슭에는 황학정이 있다. 1898년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황학정을 지었다. 한양풍경은 조선후기에 많이 그려졌다.

특히 수려한 자연환경은 한 폭의 그림 속에 담겼다. 겸재 정선 역시 인왕산 근처에 살며 수많은 그림을 그려냈다. 특히 ‘인왕산도’는 그의 불후의 명작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화가인 김홍도와 이인문도 자주 인왕산을 찾았으며, 김홍도의 절친인 강희언도 인왕산을 소재로 산수화를 남겼다.

필자미상 인왕산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19.3.18
필자미상 인왕산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19.3.18

◆북악산과 낙산, 남산

북악산은 북한산의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이다. 조선시대 북악산 기슭은 왕궁이나 관청과 가깝고, 경치가 좋아 왕족과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해 별서가 많았다. 많은 문인과 화가들은 이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그림과 시문으로 남겼다.

북악산은 청계천 발원지로도 알려지고 있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산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됐다.

특히 조선시대 낙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만들어졌다. 멀리 서울 시내가 탁 트이게 보이며, 성곽 안에 담긴 그 옛날 조선 시대를 떠올릴 수 있는 장소다. 산이 야트막 해서 조선시대 문인들이 별장을 짓고 살았다.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비 정순왕후는 단종과 이별 후 이곳 낙산에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집인 이화장(梨花莊)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남산도 오늘날까지 성곽이 일부 남아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통신 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가 있어 국방상 중요한 구실을 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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