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AD1332년, 죽음을 앞둔 원의 문종은 명종의 아들을 태자로 책립한다는 유조를 발표했다. 그러나 조카는 둘이었다. 선택권은 이미 그에게 없었다. 실권자인 연첩목아는 장성한 형 타환첩목아보다 자신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동생 이륵철백을 지지했다. 7세에 계위한 이륵철백은 43일만에 병사했다. 문종은 명종 모자에게 각박했다. 먼저 명종의 황후 필파실을 죽이고, 장남 타환첩목아는 고려로 내쫓았다. 그는 성장할 때까지 웃음을 잃었다. 고려에서 돌아와 광서로 유배될 때, 문종은 명종이 타환첩목아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유배한다고 말했다. 문종의 황후 복답실리의 지지로 타환첩목아의 계위가 결정됐다. 연첩목아는 미래의 황제를 영접하러 갔지만, 13세에 불과한 미래 황제의 쌀쌀한 표정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다. 대도로 돌아 온 그는 복답실리에게 타환첩복아를 견제하라고 설득했다. 황후는 앞장서지는 못하지만 묵인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누구도 거리끼지 않던 연첩복아가 갑자기 병사한 덕분에 타환첩목아가 무사히 즉위했다. 그가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이다. 복답실리는 순제의 사후에 문종의 아들 아극특고사에게 전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순제는 문종의 사당을 허물고, 복답실리를 추방했다. 아극특고사를 자신이 암울하게 지냈던 고려로 추방했다. 그러나 제위에 오르자마자 복수극을 펼치지는 않았다. 홀로 이를 가며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주도면밀했다. 즉위 후 그는 바얀을 중서우승상, 연첩목아의 동생 살돈(撒敦)은 우승상, 아들 당기세(唐其勢)를 어사대부로 임명하고 딸을 황후로 삼았다. 연첩목아는 죽었지만, 여전히 그의 남은 세력은 막강했다. 바얀의 중용은 그들에 대한 견제였다. 바얀은 당기세와 살돈에게 반란을 유도한 다음 일망타진했다. 다음 대상은 방자해진 바얀이었다. 바얀의 조카 톡토가 숙부를 제거했다. 대권을 장악한 순제는 숙모 복답실리와 사촌 아극특고사에게 칼날을 돌렸다. 기회는 복답실리가 제공했다.

북답실리는 자신을 태황태후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황제는 그녀의 손자인 셈이다. 기회를 노리던 순제는 재빨리 톡토에게 그것을 공식화하는 조서를 내리라고 명했다. 마지막 황제였지만 순제는 만만한 군주가 아니었다. 톡토는 조서를 철회하라고 간청했다. 순제는 깨끗이 거절하며 그대가 국가를 위해 백부 바얀까지 내쫓은 것처럼 나도 숙모를 내쫒는다고 말했다. 톡토가 페하의 계위는 태황태후 덕분이라고 말했지만, 순제는 외면했다. 감찰어사 최경(崔敬)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복답실리와 아극특고사는 각자 다른 길로 떠났다. 황가의 귀인으로 존중받으며 살아왔던 모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타격이었다. 복답실리는 과거 연첩목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이미 버스 지난 후에 손 흔들기였을 뿐이다. 동안주에 도착한 그녀는 곧바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에 걸려 사망했다. 고려로 유배된 황태자는 도중에 피살됐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순제가 은덕을 잊고, 문종의 사당을 허물었으며 숙모와 사촌동생을 살해했으므로 어질지도 의롭지도 못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정치투쟁에서의 권모가라는 입장에서 이러한 평가는 하찮은 서생들의 입방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순제의 친정을 도운 톡토의 뒤끝도 좋지 않았다. 유복통(劉福通)을 비롯한 각지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그러나 참언을 믿은 순제는 그를 운남으로 유배했다.

AD1370년, 명군의 공격을 받은 순제도 지금의 열하(熱河) 경붕현(經棚縣)까지 도망쳤다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猶識里達臘)이 몽고족을 수습해 북방으로 도주해 북원정권을 수립했다. 내분으로 제국을 잃었지만 몽고족은 문제점을 개선할 줄 몰랐다. 이후에도 일세의 영웅 태무진의 후예들은 여전히 서로 싸워 죽이기를 반복하다가 곤첩목아(坤帖木兒)를 마지막으로 단절됐다. 문제는 내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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