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뜻 이어가는 ‘맑고 향기롭게’ 김자경 사무국장

결식 이웃 밑반찬 지원, 장학금 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

[천지일보=김일녀 기자]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무소유(無所有)의 법정 스님이 입적한 지 8개월이 지났다. 스님의 삶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북동 길상사, 그곳에는 법정 스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그 가르침을 이웃·사회와 함께 나누고자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가 터를 잡고 있다.

1994년 법정 스님을 중심으로 창립된 ‘맑고 향기롭게’는 진흙 속에서도 티 없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어 가자는 취지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창립했다. 그 후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2년 뒤 비영리 사단법인 인가를 받게 됐다.

◆ “‘맑고 향기롭게’가 ‘말 꼬랑지’라고요?”
    ‘맑고’는 개인의 청정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

▲ 길상사 입구의 맑고 향기롭게 간판 ⓒ천지일보(뉴스천지)

언뜻 들으면 광고 카피의 한 대목 같기도 하고 환경 캠페인 문구 같기도 한 ‘맑고 향기롭게’라는 이름 때문에 초창기에는 웃지 못 할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모임의 창립 회원인 김자경 사무국장은 “사람들에게 ‘맑고 향기롭게’라는 이름을 말하면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며 “한 동사무소의 밑반찬 지원을 담당했던 직원이 이 이름을 듣고선 ‘말 꼬랑지요?’라고 말해 그와 싸울 뻔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법정 스님의 말에 따르면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한다고 한다.

현재 ‘맑고 향기롭게’는 마음·세상·자연 세 영역으로 나눠 시민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연꽃 스티커 제작 및 무료배포, 참선 및 주말 선수련회(템플스테이), 결식 이웃에 밑반찬 및 김치 전달, 장학금 후원, 숲 기행, 친환경 제품 직접 만들어 쓰기 등을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연꽃 스티커 배부 활동과 관련해 “스님은 ‘스티커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 붙이지 말라’면서 주부들에게는 주방이나 집안 현관 안쪽에, 그리고 나에게는 전화기에 붙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 이웃에게 맛있는 나눔을 전한 지 12년째

▲ 밑반찬 지원 조리 봉사팀 ⓒ천지일보(뉴스천지)

결식 이웃을 위한 ‘밑반찬 조리 및 전달’ 봉사 활동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시작됐다. 당시 법정 스님과 회원들은 실업자가 된 노숙자들을 위해 쉼터와 무료 급식소를 마련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가장의 실업으로 인해 남겨진 아이들과 노부모의 결식 문제였다.

김 사무국장은 그 당시 60여 가구였던 밑반찬 지원이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현재 370여 가구를 넘었고 특히 독거노인 가구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장 속상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반찬을 지원하다 보니 일주일 분량이 아닌데도 일주일치 반찬으로 놓고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웃에게 맛있는 나눔을 전한 지 12년이 흘렀다. 그동안 쌓아온 반찬 만들기 노하우가 풍부할 터. 밑반찬 조리 봉사 활동에서 만들어지는 반찬의 맛이 어떨지 순간 궁금해졌다.

김 사무국장은 “가끔 ‘조금 싱겁다’ ‘양이 좀 적다’라는 반응은 있었지만 이제까지 나쁜 평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는 12월 초, 결식 이웃을 위한 김장에 사용될 배추는 무려 3300포기에 달한다. 이 거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모임 회원만으론 인력이 부족해 일부 회원들의 회사 직원이나 부대 장병의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밑반찬 조리 봉사 활동이 있던 날 오후. 길상사 옆 조리장에는 수십 명의 회원이 앞치마를 두른 채 닭볶음탕과 단무지 무침을 만들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단무지 무침이 다 만들어지자 등장한 것은 바로 수평저울. 뒤이어 최두리 조리팀장의 나눗셈 계산이 이어졌다. 지원할 모든 가구에 균등하게 배분하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한 것이다.

◆ “나눔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
    법정스님이 강조한 ‘行’을 최우선으로

▲ 김자경 사무국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어떤 질문을 던져도 기다렸다는 듯 바로바로 답변하던 김 사무국장은 ‘어떤 것이 진정한 나눔인 것 같으냐’는 질문에 순간 답하기를 망설였다.

잠시 고심하던 그는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좋아서 찾아간 것일 뿐”이라며 “특히 이곳에서 17년 동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스님에 대한 존경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함께해온 회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내가 좋으면 조건 없이 열심히 하는 거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억지로 하라고 하면 못하잖아요”라고 부연했다.

이어 그는 또 법정 스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스님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우주(宇宙)가 내게 잠시 맡긴 선물이다. 잠시 내게 맡긴 것이니까 잘 보존했다가 우주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 선물을 주려고 할 때 기꺼이 내줘야 한다’고 하셨다”며 “이게 바로 나눔”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스님이 강조하신 것 중 하나가 ‘행(行)’인데, 나눔에 대해서 백날 이야기해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시며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면서 “그래서 우리 모임은 봉사 단체가 아닌데도 봉사 활동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전했다.

◆ 작은 일도 세세하게 챙겨주던 법정스님

17년 동안 법정 스님과 함께 ‘맑고 향기롭게’의 실무를 맡아온 김 사무국장이 가까이서 지켜본 스님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제가 만난 스님은 자기질서가 철저하고 정이 깊은 분이셨다”며 “같이 사는 남편도 제가 머리를 잘랐는지, 감기에 걸렸는지 알아채지 못하는데 스님은 단번에 알아보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스님은 작은 일도 세세하게 챙겨주셨고 별일 아닌 제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시는 정이 깊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법정 스님에 이어 ‘맑고 향기롭게’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한 길상사 주지인 덕현 스님은 취임 고불식에서 “이 모임이 이 시대에 ‘화중생련(火中生蓮)’처럼 피어나는 수행 공동체이기를 바란다”며 “또 옛 문화의 가치를 오늘에 되살리고 자연의 품으로 더욱 다가갔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맑고 향기롭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법정 스님이 펼쳐 놓은 뜻을 덕현 스님이 실천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며 “내년부터는 좀 더 새롭고 폭넓은 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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