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초등학생인 순영은 겨울방학을 맞아 산골마을 외딴 곳에 있는 할아버지댁을 방문했다. 입담이 좋은 할아버지는 책에도 없는 옛날이야기로 순영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직에서 퇴직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주로 자연과 생물에 대한 것이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고 있는 생물들의 착한 속성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어여쁜 우리 공주님이 오셨구나.”
산골마을로 찾아간 순영을 할아버지, 할머니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저녁을 먹고 나자 연탄난로를 피워 놓은, 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조그만 거실에 마주앉아 할아버지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난로 뚜껑 위에는 주방 칼로 납작납작 썰어 놓은 고구마가 노릿노릿 익어가고 있었다. 마침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할아버지는 이야기 도중에 가끔 거실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이 엄청 많이 오는군. 걱정이야, 이런 날은 사냥꾼들이 설치기 마련이지.”

이튿날 아침에도 눈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30년 만의 폭설이라고 티브이 아침 뉴스에 눈썹 짙은 아나운서가 떠들어댔다. 순영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눈 속에 갇혀 있을수록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으니까 아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눈발은 멈추었으나 날씨는 좀처럼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광에서 무엇인지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 덮인 산이나 들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는 짐승들이 마을로 내려올 것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마른 풀과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빈 양동이에 가득 담아 집에서부터 가까운 산모퉁이까지 조금씩 군데군데 뿌려놓았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짐승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땅거미가 마을 언저리에 내리기 시작할 무렵 할아버지는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 앞에도 먹이를 조금 두었다. 먹이를 마지막에 쏟아 놓은 곳은 헛간이었다. 배불리 먹은 짐승에게 잠자리까지 배려해 주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순영은 짚단과 가마니를 날라다 헛간에 깔아놓았다. 전등을 끄고 촛불 하나만 켜 놓은 거실에 할아버지와 순영은 연탄난로에 둘러앉았다. 밤이 깊어 가도록 할아버지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난로 뚜껑 위에 올려놓고 젓가락으로 순영이 굴리고 있는 것은 흰 가래떡이었다.

한참 옛날이야기에 열중하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촛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어둠 속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순영을 향해 검지를 입술 가운데 세웠다. 순영은 숨을 죽이고 할아버지의 눈빛을 따라 창 밖 대문으로 시선을 쏘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때 막 짐승의 머리가 대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짐승의 머리에서 두 개의 파란 불빛이 반짝거렸다. 순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할아버지는 순영의 조그만 귀를 잡아당겼다. 순영은 깜짝 놀랐지만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고라니 새끼야.” 속삭인 뒤 할아버지는 순영의 귀를 도로 제자리로 밀어 놓았다. 고라니 새끼는 대문에서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린 뒤에야 다리를 절룩이며 조심스럽게 헛간으로 들어섰다.

밤이 지나고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기 시작하자 할아버지는 순영을 조용히 깨웠다. 선잠을 깬 순영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유리창에 머리만 빼꼼히 내민 채 헛간을 바라보았다. 그때 고라니도 자리에서 막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밤에는 몰랐지만 새끼 고라니의 절룩이는 불편한 다리로 보아 다친 것 같았다. 고라니는 두 사람이 내다보고 있는 창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 순영은 움찔해서 할아버지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쉬’라는 소리만 조심스럽게 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아 비록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보이는 고라니의 크고 동그란 아름다운 눈동자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순영은 그 눈동자를 본 순간 몹시 슬픈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을 본 고라니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아마, 먹여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 준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고라니는 절룩거리며 천천히 대문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순영이가 머리맡에 벗어 놓았던 빨간 외투를 재간 좋은 축구선수처럼 재빠르게 발로 걷어 올렸다. 외투를 순영에게 날쌔게 던져준 할아버지는 조용히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까치발로 함께 마당으로 내려섰다.

두 사람은 대문 앞까지 나갔다. 눈 쌓인 산모퉁이를 향해 벌써 멀리 사라져가는 새끼 고라니를 배웅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슬픈 눈으로 뒤돌아보는 고라니에게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다시 오라고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를 따라 순영이도 조그만 손을 높이 흔들었다. 새끼 고라니가 막 산모퉁이를 사라져 보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어디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새벽 공기를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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