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시민주권 홍보기획위원장

지난 12일 서울 COEX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마지막 행사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장.

미국 기자들의 질문만 받던 오바마 대통령은 30여 분이 가까워 오자 “마지막 질문 기회는 한국 언론에 주겠다”고 말했다. 한국 기자들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앞줄에 앉아 있던 중국 중앙방송(CC-TV)의 루이청강(芮成鋼)이 손을 들고 유창한 영어로 “난 중국인이지만 아시아를 대표해 질문하겠다”고 나섰다.

당황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었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루이는 “한국 기자들이 괜찮다면 질문을 하고 싶다”고 버텼다. 거듭되는 실랑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자의 질문이 없자 오바마 대통령은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간다”며 불편한 표정을 짓곤 결국 루이에게 질문권을 줬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많은 것을 떠오르게 했다. 일선 취재현장에서는 무례할 정도로 피의자 등에게 공세적 질문을 퍼부어 대던 한국 언론의 치열한 기자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자괴감이 먼저 떠올랐다. 영어가 짧아서? 혹은 오바마란 거물에 주눅이 들어서? 루이가 질문권을 얻기까지의 2분여 동안은 난감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또한 전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더구나 한국 땅 안에서 감히 중국 기자가 ‘아시아를 대표’한다고 나선 대담무쌍한 중국의 기세다. CC-TV 경제채널의 앵커로 이미 많은 유명인사와 인터뷰를 진행한 경험이 있는 데다 2007년 “스타벅스는 자금성에서 떠나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려 미국 기업을 쫓아내 성가를 올린 바 있는 루이 기자는 이 장면 하나로 순식간에 중국 전역에서 ‘아시아를 대표하여 미국의 콧대를 꺾은 인물’로 급부상했다.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거대 중국의 화려한 등장은 경이롭다 못 해 두려울 지경이다. 최근의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중국은 올해 2/4분기 GDP가 1조 3369억 달러로 일본의 1조 2883억 달러를 앞서며 분기실적 면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이어 올해 3/4분기에서도 중국은 1조 4154억 달러로 일본의 1조 3719억 달러를 제쳤다. 2분기 연속 2위를 기록한 중국은 올 9월까지 모두 3조 9468억 달러로 3조 9674억 달러인 일본에 뒤져 있지만 현재의 추세라면 연말에는 GDP에서 일본을 추월하고 명실공히 G2 국가로 발돋움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3일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명단에서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포브스는 후 주석이 “세계 인구 5분의 1에 해당하는 13억 명을 거의 독재적으로 통제하는 지도자”라며 “서방 지도자들과 달리 성가신 간섭 없이 도시를 건설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가두며 인터넷을 검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발표에서 3위는 세계 최대 원유 자원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이 차지했다. 68명이 선정된 리스트에 이명박 대통령은 없었지만 지난해 24위였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1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41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다. 2008년 <금융의 지배>라는 문제 저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하버드대 경제사 교수는 20일 “500년 서방 우위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세계는 이제 중국 중심의 시대를 맞을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퍼거슨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에 게재한 ‘중국의 궤도 안에서’라는 장문의 글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세력 교체기를 맞아 당혹해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동방의 도전은 엄연한 현실”이라면서 “어떤 면에서는 이미 아시아 세기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마틴 자크 영국 런던 정경대학 연구위원은 최근 펴낸 역작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서구식 보편주의는 더 이상 보편적으로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욱일승천은 인접국인 한국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은 명약관화하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중국의 위세를 애써 무시한 채 미국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중국의 등장은 우리에게 위기이지만 기회로도 작용할 수 있다. 보다 자주적이고도 실리 있는 외교전략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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