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인 장희구(73) 문학박사가 시조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번안시조’에 대해 설명하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천지일보 2019.3.8
시조시인인 장희구(73) 문학박사가 시조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번안시조’에 대해 설명하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천지일보 2019.3.8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


문답 형태로 돼 있는 ‘하여가’와 ‘단심가’는 조선 개국을 둘러싼 이야기가 잘 담긴 시조다. 짧은 글이지만 두 시조 안에는 이방원의 개국에 대한 야망과 정몽주의 고려에 대한 충절이 잘 내포해 있다.

이 같은 시조에 대해 문학박사이자 시조시인은 장희구(73) 박사는 “시조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특성을 담고 있다”며 “고려 중엽에 시작해 말엽에 그 형식이 완성돼 조선 시대에 집중적으로 창작되고 향유됐다”고 차근히 설명했다. 

노랫가락에 맞춰 시조 한수를 읊는 장 박사. 그의 인자한 미소는 마치 옛 선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그가 얼마나 시조를 사랑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쉽게 읽히도록 써내려간 ‘번안시조’

1945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장 박사는 광주교육대학과 조선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고전문학)를 취득한 후 남부대에서는 고별강의를 끝으로 퇴임했다. 조선대·목포대 등에서는 교양 국어와 작문 강의를 했고, 서울교대·공주교대 등에서는 한자한문교육 강의를 했다. 일부 언론에서 신문 주필과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칼럼과 매일 한자 등을 20년 넘게 작성하고 있다. 1968년부터는 수십 편의 논문과 기사문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특히 장 박사는 시조를 대중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시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노래로 부르며 즐기던 갈래로 곡조는 16세기 무렵부터는 장중한 가곡(歌曲)창으로, 18세기경에는 시조창으로 노래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창작된 것들은 노래하지 않았다. 음악적 특성은 변했어도 문학 갈래로서의 특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시조를 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역사적 배경과 함께 수많은 한자를 알아야만 시조를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장 박사는 시조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번안시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장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번안시조에서 ‘번안’의 역사는 고려 말 익제 이제현 선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 박사는 “당시 우리 선현들은 누정에 앉아 한시 한수를 지어놓고 한시창으로 음영했고 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가락에 맞는 3,4조가 되면서 시조창이 됐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 선현들의 문헌을 살펴보면 시조를 한시로 개작하거나 한시를 시조로 개작했던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고려 말 익제 이제현 선생이나 조선말의 자하 신위, 일제강점기의 안서 김억 선생 등의 문집을 보면 ‘소악부’라는 제목을 붙여 개작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후 서울대 이응백 박사가 운명을 달리하는 순간까지 불과 몇 수 되지 않았으나 한시를 시조로 고치면서 ‘번역시조’라고 이름했다. 이응백 박사는 장 박사가 은사의 예우를 갖추었던 인물이다. 

장 박사는 “이응백 박사의 유지를 받들어 4구인 한시를, 3구인 시조로 번안하거나 다시 시조를 한시로 역번안했다”며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번안시조’라 이름했고, 문학평론 차원에서 감상하고 분석하고 시평하는 일을 수년째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조를 알리는 길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장 박사는 “천년을 이어온 우리 문헌인데 한글이 사용되면서 칼로 자르듯 잘라졌다”며 “한시를 공부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시조를 일반 독자에게 알리는 것은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시조를 알리기 위한 그의 사명은 더욱 막중했다.

◆“시조 더욱 알려져야”

장 박사는 “시조의 ‘시’자는 ‘때 시(時)’를 사용한다”며 “봄철, 여름철 하듯 때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시조는 고려 말부터 많이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시조가 많이 보급됐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3대 시조에는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가 있다. 청구영언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가곡(歌曲) 노랫말 책이다. 

조선 영조 때의 가인 남파 김천택이 고려 말엽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여러 사람의 시조를 모아 1728년(영조 4)에 엮어냈다. 해동가요는 조선 영조 때 김수장이 편찬한 가집이다. 가곡원류는 1876년(고종 13) 박효관과 안민영이 편찬한 가집이다. 당시 3대 시조집은 민간에 많이 유포됐으며, 우리 선조들은 시조와 한시를 함께 읊었다. 

하지만 오늘날 시조 작가의 현실은 1천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는 자유시를 창작하는 작가의 수(8만명)에 비하면 매우 저조한 실정이다.

시조의 경우 ‘초장·중장·종장’ 등을 율격에 맞게 작성해야 하는데 이 작업이 어려워 진입장벽이 쉽지 않다. 게다가 현대에는 창작이 잘 반영되는 자유시의 인기가 높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로 꼽힌다.

장 박사는 “시조는 본래 뜻이 있는데 자연과 함께 사는 애환을 짧은 시조에 담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잔잔히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시조를 가르치는 곳도 있고 시조를 보급해야한다는 문학단체들이 여러 곳에 있다며 많이 접해보고 많이 써보면 시조만이 갖는 감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장 박사는 “시조는 우리의 역사가 담긴 문화”라며 “아리랑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듯, 북한과 남한이 합의해서 씨름이 등재됐듯, 순수한 시조가 우리 문화·역사이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시조를 국민들이 더욱 자주 접하고 읽어보는 국민적 운동으로서의 ‘시조 부흥운동’이 꾸준히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