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592년 4월 13일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짐을 알았지만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1591년 3월, 일본을 다녀 온 조선통신사는 선조를 접견했다.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은 1590년 7월 22일에 교토에 도착해 11월 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1591년 1월에 귀국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해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된다고 일축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김성일은 답변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로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는 동인이 집권했기에 대세는 김성일에게 기울었고, 동인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공격했다. 마침내 선조는 ‘전쟁이 없다’고 결론내리고 이를 국론(國論)으로 정했다.

불행하게도 1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김성일은 ‘전쟁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없다’고 단언해 ‘부정의 오류(False Negative)’를 범했다.

이런 오류는 김성일의 잘못된 일본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는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로 깔보았다. 1543년에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전투의 혁신을 이룬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을 하찮게 봤다.

한편 1591년 11월에 홍문관 부제학 김성일 등이 상소했다. 상소 요지는 축성을 중지시키고,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됐다는 것이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11월 1일)

1591년 7월에 선조는 성읍 수축을 지시했다. 호남·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했다. 축성은 경상감사 김수가 제일 열심히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노역을 꺼리고 원성이 높았다. 김성일은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이는 김성일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상당수 위정자들이 김성일과 같은 의견이었다.

이러자 김수는 ‘성을 쌓는 일이 사대부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갈등만 낳았고, 왜침 대비는 속도와 힘을 잃은 채 흐지부지됐다.

또한 김성일은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된 인사라고 상소했다. 1591년 2월 13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7계단 뛰어넘은 파격 승진에 대간들은 문제를 제기했지만 선조는 단호했다.

그런데 9개월이 지나 김성일이 다시 이순신의 승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선조는 불쾌했다. 만약 선조가 이순신을 교체했으면 어떠했을까? 아마 조선은 망했을 것이다.

하노이 담판 결렬로 외교와 안보가 어려워지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은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니, 미세먼지 재앙부터 막아야 한다. 국민에게 시급(時急)한 것은 한반도 평화보다 미세먼지 없는 나라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