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봄이 되면 어린 아이들이 나들이에 나선다. ‘병아리 떼 쫑쫑쫑 놀고’ 가는 것처럼, 아이들이 봄날의 풍경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선생님의 표정도 꽃처럼 밝다. 그 모습이 몹시 흐뭇하고 보기에 참 좋지만, 아이들이 무사히 소풍을 마치고 잘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자식 키워 본 부모들 마음이 그렇다.

어린 아이들이 봄 소풍을 잘 마치고 다시 부모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을 믿기 때문에 아이들을 바깥으로 내 보내는 것이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하나도 아니고 열 명 스무 명을 혼자서 책임진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내 아이를 잘 돌봐 줄 것이라 믿고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가방에 녹음기가 들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혹시 선생님이 아이한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거나 몹쓸 짓을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걸 증명해야 하니, 아이의 소풍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보내는 것이다. 평소에도 가방이나 옷에 녹음기를 넣거나 목걸이 형태의 녹음기를 걸어 보내기도 한다. 녹음기인지 액세서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신통한 물건들도 많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어린 아이는 맞아도, 구박을 받아도, 험한 소리를 들어도, 그걸 제 입으로 옮기지 못하니, 부모는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막을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다. 그러니 아이 가방이나 옷에 녹음기를 넣어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좀 놓이는 것이다.

새 학기가 돼 아이들을 맡아야 할 유치원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난감해졌다. 나랏돈을 받으면 투명하게 집행하는 게 당연한데도 그걸 하지 않겠다고 하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유치원과 정부, 학부모 사이에 불신만 깊어졌다.

불신의 사회다. 거짓말이 일상화돼 있다. OECD 국가 중 사기사건이 제일 많은 나라다. 가장 정직해야 할 정치인들이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다. 세상이 거짓말 천지이고 불합리한 일들이 난무하니, 몰래 녹음하고 촬영해서라도 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학교에서 아이들이 일제히 손전화기를 꺼내들어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죄를 짓고 경찰에 불리어 온 사람이 되레 큰 소리를 치며 녹음기를 켜기도 한다.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경찰이 죄인 앞에서 도리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황당한 일들이 생겨난다. 서로 믿지 못해 벌어지는 우습고도 슬픈 현실이다.

미국과 북한 정상회담이 끝난 뒤에도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북한은 전례 없이 한밤 기자회견을 자청해 답답함을 호소했고, 미국은 북한의 주장을 부인했다. 녹음이나 촬영이 된 기록물이 공개되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록만큼 정확하고 명백한 증거는 없다.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방패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창이 되기도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잘 쓰면 약이고 잘 못 쓰면 독이 된다. 몰래 녹음하고 촬영하지 않고서도 믿고 사는 세상, 거짓말 좀 덜 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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