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 황사, 조선의 불청객이었던 이유ⓒ천지일보 2019.3.4
봄철 황사, 조선의 불청객이었던 이유ⓒ천지일보 2019.3.4

황사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과학발달로 관측·기록 활발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하지만 봄철만 되면 찾아오는 불청객도 있으니 바로 ‘황사’다. 황사란 주로 봄철에 중국이나 몽골의 사막에 있는 모래와 먼지가 상승해 편서풍을 타고 멀리 날아가 서서히 가라앉는 현상이다. 토우(土雨), 흙비라고도 불리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황사로 인해 백성들이 고난을 겪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삼국시대 속 황사 기록

먼저 한국에서 나타나는 황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시대의 아달라왕 21년(174년)에 ‘하늘의 신이 화가 나서 비나 눈이 아닌 흙가루를 땅에 뿌리는 우토(雨土)를 내려 왕과 신하들이 몹시 두려워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우(雨)는 떨어진다는 움직임을, 토(土)는 토양을 의미한다. 즉 지금의 황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770년, 780년, 850년에 각각 우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백제에서도 379년과 606년에 온종일 우토 현상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시대에는 총 59건 64일간의 황사기록이 남아있다. 봄철의 기록이 가장 많으며 여름에는 기록은 없는 상태다. 황사 현상에 대한 정의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때 ‘서운관지’에 ‘우토 때문에 사방이 어둡고 혼몽하여 띠끌이 내리는 것 같다”고 기술돼 있다.

◆한양 내린 흙비, 재앙으로 여겨

황사에 대해 기록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다. 세종 23년 고안된 측우기 등 다양한 과학기술이 발달해 기상현상에 대한 관측과 기록을 남기면서다. 황사기록은 16세기에 가장 많았고, 임진왜란 전후 43년간은 전무했다. 조선시대에는 총105건 114일간의 황사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우토 대신 ‘토우’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명종실록(명종5년 3월 22일자)에 따르면, ‘한양에 흙비가 내렸다. 전라도 전주와 남원에는 비가 내린 뒤에 연기 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었으며 지붕과 밭, 잎사귀에도 누렇고 허연 먼지가 덮였다. 쓸면 먼지가 되었고, 흔들면 날아 흩어졌다. 25일까지 쾌청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성종 9년 4월에도 흙비가 내렸다. 성종은 “덕이 적고 우매한 내가 한 나라에 임하여 밤낮으로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지난달에는 지진이 있었고 이달에는 흙비가 내리니, 재변(災變)이 오는 것이 어찌 불러 일으키게 하는 바가 없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종은 흙비와 같은 재이(災異)를 일으킨 이유와 그치게 할 방법을 논의하라고 했다.

숙종실록(숙종7년 4월 7일)에는 ‘강원도에서 3월 그믐부터 3일 동안 계속해서 토우가 내려 옷에 맞으면 황색(黃色)을 이루었는데, 보면 바로 혼탁(混濁)한 황토물이었으며, 밤낮으로 안개가 끼어 어두웠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황사라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한 걸까. 바로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근대 관측된 서울에서의 황사 일수를 보면,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의 황사 일수가 가장 많았다. 이처럼 황사를 해석하는 시각은 시대마다 달랐으며, 수백년 전 찾아왔던 황사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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