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지난 27일 전남 나주시 나주초등학교 인근 찻집에서 나천수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3.1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지난 27일 전남 나주시 나주초등학교 인근 찻집에서 나천수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3.1

일본인 교장 반대, 학생들 퇴학

독립운동 있기 전 항일운동 初
학교 발자취 정리하던 중 발견
대정 9년 졸업생 無 이유 밝혀
후손 찾아 고인 원혼 위로해야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3.1절이 일어나기 1년전인 1918년 일본인 교장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나주보통학교 30여명의 학생이 퇴학당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의 효시기도 합니다. 3.1절 100주년을 맞아 이분들의 한(恨)을 풀어드리는 것은 이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3.1운동, 6.10만세 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 만세운동의 하나로 평가받는 ‘나주학생독립운동’의 고장인 전남 나주에서 3.1절이 발생하기 1년 전인 1918년에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2월 27일 전남 나주시의 한 찻집에서 만난 나천수씨는 “1918년 나주에서 ‘일본인 교장 반대 항일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있었다”며 “특히 올해는 3.1절 100주년으로 이분들을 꼭 좀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천수(73세, 나주시 금계동)씨는 나주초등학교 48회 졸업생으로 올해 나이 73세다. 전남도 통상협력과장, 정보통신담당관, 나주시 공보실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16년에는 전남대학교에서 한문고전번역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그는 나주역사 및 호남학에 관심을 두고 향토사를 연구하고 있다.

고(故) 박인천 금호그룹회장 나주초등학교 명예졸업장. 지난 2007년 5월 17일, 현재 고인이 된 이순정 여사가 대신 받았다. (제공: 나천수씨) ⓒ천지일보 2019.3.1
고(故) 박인천 금호그룹회장 나주초등학교 명예졸업장. 지난 2007년 5월 17일, 현재 고인이 된 이순정 여사가 대신 받았다. (제공: 나천수씨) ⓒ천지일보 2019.3.1

나천수씨는 이날 기자에게 지난 2007년 나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작한 나주교백년사(羅州校百年史, 1907~2007), 나주초등학교 별책부록, 직접 채록한 자료 및 사진 등을 보여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10여년전 나주초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나주교백년사(개교 100주년 기념 책)발간, 기념비 제작 등에 참여하게 됐다”며 “그 과정에서 학교 발자취를 정리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학교에 비치된 역대 졸업 사진 중에 ‘대정8년 제10회 졸업생’ ‘대정10년 제11회 졸업생’이란 표제를 보고 대정9년 졸업생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정9년은 1921년도”라며 “이는 1918년 일본인 교장 반대 사건으로 전원 퇴학당했던 학생들이 졸업할 해다. 전원 퇴학했으니 졸업생이 없었다. 9회 졸업생과 10회 졸업생 사진을 보면 한해를 건너뛰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천수씨는 “기념 책 집필 과정에서 1917년에 입학해 1921년(1차 학제 개편, 수업연한 4년제)에 졸업해야 할 학생들의 학적부 일체가 나주초등학교에 없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며 “그때까지 살아있는 학생(사람)이 없어 직접 과거사를 들을 순 없었지만, 나주초 백년관에 전시 비치된 역사자료, 나주초등학교 총동문회 김대현 회장의 증언, 나주 원로, 후손들의 증언을 모으는 과정(채록함)에서 항일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나주초등학교 백년관 ⓒ천지일보 2019.3.1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나주초등학교 백년관 ⓒ천지일보 2019.3.1

 그는 “1907년 5월 20일 공립 나주 보통학교로 인가돼 개교된 이 학교는 1, 2대는 조선인이 교장을 하고 3대는 네모토 교장부터 해방 전까지 12명의 일본인 교장이 발령됐다”고 말했다.

이어 “나주지역 원로들과 후손, 주변인의 증언에 따르면 1918년 학교에서 오로지 일본말을 하도록 강요한 일본인 교장 카게이(影井市歲)에 대한 반대 스트라이크가 학교 밖에서 일어났는데 일제는 이를 작은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이 작은 불씨의 반일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면 엄청난 반일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 ‘전원 퇴학’으로 사건을 진압하면서 근거서류인 학적부마저 없애버린 것”이라며 “당시 사건의 책임을 물어 카케이 교장을 오오쓰가(大塚啓次郞 )교장으로 교체했다”고 말했다.

나씨는 “나주 항일 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 선생, 거북선 제작의 나대용 장군, 구한말 나주 의병들이 일으킨 1896년 나주 단발령 의거 때 일제 앞잡이를 죽였던 사건 등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며 “이를 일찍이 감지한 일제는 ‘전원 퇴학’을 통해 나주를 더욱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미리 싹을 자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러한 일로 1919년 3.1 운동 때 나주는 다른 지역보다 활발한 항일운동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제가 이 사건을 작은 일로 보았다면 주모자급만 퇴학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불씨가 큰 불씨로 번질 것을 우려해 전원 퇴학 처분으로 맞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또 “1910년 한일병탄 된 8년 후인 1918년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은 학생들의 반일운동 효시라고 볼 수 있다”며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적어도 초등학교 차원의 반일운동은 나주가 최초인 듯하니, 독립운동사에도 이 사건을 수록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나천수씨는 “이번 기회에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100년 전의 이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고 지금이라도 후손들을 찾아 이들에게 명예 졸업장을 줘서 고인의 원혼을 위로하는 것이 후손, 후배의 할 일”이라며 “늦었지만, 이러한 중요한 사건을 지금이라도 나주 독립운동 연구 차원에서 전국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거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나천수씨는 실제 명예 졸업장을 받은 인물을 거론했다. 그는 “구한말 후 시대적 격동의 삶을 살았던 고(故) 박인천 금호그룹회장이 나주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며 “80여년이 지난 2007년 5월 17일, 지금은 고인이 된 이순정 여사가 대신 받았으며 박인천씨는 살아생전에 학교 졸업장을 받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자주 언급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나주독립사(2015, 나주시) 151쪽에는 “3.1운동에서 나주는 이렇다 할 활동이 적은 편이었다. 그것은 1896년 이후 나주가 여러 차례의 의병항쟁으로 인적 손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만세운동을 주도할 만한 인적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지난 27일 전남 나주초등학교서 나천수씨가 개교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인터뷰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천지일보 2019.3.1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지난 27일 전남 나주초등학교서 나천수씨가 개교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인터뷰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천지일보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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