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공주 ②] 무령왕릉, 1500여 년간 잠들었던 백제문화와 함께 눈뜨다
[문화재 탐방-공주 ②] 무령왕릉, 1500여 년간 잠들었던 백제문화와 함께 눈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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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릉 입구. 왕릉 내부는 훼선 우려 때문에 공주박물관과 무령왕릉 재현관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문화를 주변에 전파해줄 만큼 찬란한 문명을 가지고 나라를 꾸려갔던 백제. 하지만 우리는 백제가 이렇게 찬란한 문화를 향유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백제인의 손으로 쓴 역사 기록조차 한 줄이 없어 그야말로 감춰질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약 30년 전인 1971년 원형을 고스란히 간지한 채 잠들어 있었던 무덤이 발견됨에 따라 백제의 화려한 문화가 빛을 보게 됐다.

◆‘무령왕릉’ 덕분에 밝혀진 찬란한 문화

 

 

▲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의 내부.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능(陵)은 백제의 왕이었던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 무덤이어서 더욱 사람들을 흥분케 했다.

물론 이에 앞서 1927년에 송산리 고분 1~4호, 1932년에 송산리 고분 5, 6호가 발굴·조사 됐지만 이것은 이미 도굴된 것이었다. 유물도 상당부분이 분실됐었던 터라 그 귀중함이 더했다.

 

 

 

 

▲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현재는 무령왕릉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재현관을 통해 능의 모습과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능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여전히 백제의 화려함을 간직한 채 빛을 내고 있다. 도둑질 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1500년의 세월을 무덤 속에서 간직했던 무령왕릉의 유물들.

이 유물 덕분에 소박하고 특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온 백제의 문화가 사실은 감춰졌을 뿐 화려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됐다.

 

 

 

 

▲ 은잔. 왕비의 머리 부근 남쪽 가까이에 놓여있었던 은으로 만든 잔과 뚜껑, 잔받침. 겉면엔 화려한 문양으로 가득 장식돼 있다.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능에서 발굴된 유물은 사용된 재질로만 분류해도 석조물, 목제품, 금은제품, 청동기류, 도기류 등 다양하다. 모두 합하면 108종 2906점으로 이 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 해도 12종 17점에 달한다.

조사된 무령왕릉은 봉토가 마치 작은 봉우리 같은 외형을 한 원형으로 보통의 직경은 약 20m이며 높이는 현실 바닥에서 7.7m에 이른다.

하지만 오랜 시일이 경과하면서 유실이 심했던 것으로 보여 원래는 현재의 상태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능의 천장은 아치형으로 묘실 내부 규모는 남북길이 4.2m, 동서 너비 2.72m이며, 천장 중앙까지의 높이는 3.14m다. 왕부부의 합장무덤으로서는 낭비공간이 별로 없는 기본적인 규모다. 이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으로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송산리 6호분과 함께 유일하다.

◆무령왕, 왕권강화로 지방세력 통제

 

 

 

 

▲ 무령왕 동상. /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무령왕릉은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501~523년)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이다. 특히 무덤 입구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에서는 명문전이 발견돼 주목을 받았다.

그 안에는 ‘壬辰年作(임진년작)’ 이라고 기록돼 있어 무령왕이 승하(523년)하기 11년 전인 512년에 축조 또는 준비된 것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됐다.

또한 왕이 죽기 10여 년 전부터 이미 왕릉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왕권이 얼마만큼 강했었는지도 짐작케 한다.

웅진기의 국왕은 고구려의 침입을 저지하면서 국왕 중심의 왕권강화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고구려의 갑작스런 침략으로 475년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

웅진이 적합지로 선택된 것은 이 지역의 토착 집단이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고 있었고, 중국 남조의 문물을 받아들여 그 위세품을 통해 내부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등 기반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착세력이 강한 것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가 됐다. 왕권강화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던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귀족들에게 제거됐다.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신발.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무령왕은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담로제를 통해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담로제는 군현과 같은 행정 단위인 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통치하는 방법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하며 나라를 견고히 했다.

특히 웅진시기 동성왕과 무령왕 대에서는 대외교류가 활발했다. 중국 남조의 제와 양 등과 교섭이 재개되기도 했다. 양과는 521년에는 무령왕이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백제왕이라는 작호를 받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울러 남조의 문화를 흡수해 백제의 것으로 소화해냈다. 이렇게 발전된 문화는 왜(일본)의 아스카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신라나 대가야에도 백제문화를 전해 환두대도, 마구, 성시구 등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백제 유물들은 오늘도 그 찬란한 문화를 담은 채 무령왕릉 재현관에서 현대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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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아 2010-11-24 14:27:43
무령왕릉 내부가 웅장하군요. 오늘 처음보는건데..
대단해요~

진주 2010-11-24 04:40:35
무령왕 동상을 볼때에 마치 옆집 아저씨같은데 그시대에 왕권강화를 통해 나라의 기틀을 다졌고 무덤이나 출토된 문화재들을 볼때에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움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