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금서루.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박수란 기자] 백제를 생각하면 문화강국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정교하고 화려한 백제 유물들에서 감춰졌던 백제문화의 우수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공주. 공주에 왔다면 어김없이 공산성을 가봐야 한다. 공산성은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며 백제 왕궁 터가 남아 있어 의미가 깊다.

백제는 초기에 한강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수용이 수월했고 비옥한 농경지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일본 고대국가 성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백제임에도 고구려·신라사에 비해 백제사는 소외돼 왔다. 하지만 1970년 중반 이후부터는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지난 9월에 열린 ‘세계대백제전’을 통해 백제의 역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백제의 초기 역사가 담긴 공산성은 백제가 도읍지였던 한성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빼앗기고 내려와 정착한 곳이다.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왕도를 지킨 산성이다. 지금의 공산성은 고려시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

공산성은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혜의 요새다. 원래는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바뀌었다.

공산성의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된 문루인 금서루를 볼 수 있다. 그곳을 통과해 표지판을 따라가면 숲길과 함께 백제의 역사를 따라 걷는 느낌이 든다. 산책도 하며 백제의 역사도 느끼고 일석이조라 하겠다.

 

 

▲ 충남도기념물 제42호인 깊이 약 9m에 이르는 연지(연못). 연지는 바닥까지 계단으로 돼 있어 물을 긷기 위해 언제든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금강과 연지 사이엔 만하루가 세워졌다.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일시 파천했던 쌍수정.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좀 더 걷다보면 이번엔 쌍수정이 등장한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왕성(王城)이기는 하나 백제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쌍수정이 그러하다. 쌍수정은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잠시 공주에 머물렀던 흔적이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에 정3품의 작호를 하사했다. 나무는 죽고 이 유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가 쌍수정이다.

이때에 얽힌 재미난 설화가 있다. 인조가 피란 왔을 당시 배가 고팠던 임금에게 임씨란 사람이 떡을 내놓았다. 인조는 그 떡을 먹고 ‘절미(뛰어난 맛)’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씨의 절미라고 해서 임절미라고 떡의 이름을 지었다. 그 임절미가 오늘날 우리가 맛있게 먹고 있는 쫄깃한 인절미로 불리게 됐다는 유래다.

이 밖에도 백제 동성왕 22년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된 임류각이 있다. 공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금강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금강의 모습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만하루는 공산성에서 가장 멋진 곳으로 손꼽힌다. 또 이곳에는 바닥까지 계단이 있는 연지가 있는데 단순히 연못이라기보다는 바닥까지 계단을 만들어 놓아 물을 길을 수 있도록 해 물을 저장하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도지정유형문화재 제51호인 영은사의 가을 풍경.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조선시대 문루건축의 좋은 예이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과 강북을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이었다. /강수경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이 밖에도 8.15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 이름이 개칭된 누각과 세조 4년에 지은 사찰인 영은사,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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