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하였는데
[전경우의 문화 찔러보기]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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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1894년 하나야마란 일본 사람이 10대를 들여 온 것이 우리나라 인력거의 시초다. 당시 우리는 가마를 타던 시절이다. 가마는 양반들이나 타는 것이고, 여염집에서는 시집가는 신부가 탈 수 있었다. 가마는 장정 넷이 들어야 하고, 안에 탄 사람은 멀미 때문에 고생을 했다. 생전 처음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간 신부가 멀미 때문에 시댁에 가서 절도 제대로 못하는 일도 있었다.

가마에 비하면 인력거는 참으로 신통한 물건이었다. 가마처럼 여러 사람 필요 없이 한 사람이면 되고, 멀미도 없는데다 빠르기까지 했다. 인력거꾼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제 힘으로 돈 벌어 공부를 하는 고학생도 있었고, 기생을 딸로 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인력거를 탄 기생이 인력거를 모는 이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공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생은 인력거의 주요 고객으로, 기생을 부르려면 인력거 정도는 보내 주어야 했다.

주요섭은 소설 ‘인력거꾼’에서, 매일같이 지나친 뜀박질을 하는 탓에 인력거꾼은 9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썼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는 인력거꾼 주인공이 등장한다. 며칠 동안이나 허탕만 치다가 어느 날 큰돈을 번 김첨지가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설렁탕을 사들고 집에 들어왔지만,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문학 작품 속 인력거꾼들은 주로 가난한 하층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대변했다.

밑천이 있는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사서 장사를 하면 됐지만,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인력거를 빌려야 했기 때문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요즘 택시로 치면 법인 택시 기사인 셈인데, 이런 인력거꾼들은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녀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인력거가 선보인 지 14년 뒤인 1898년 서울에 전차가 생겼다. 전차는 인력거에 비하면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아무 일 없이 내달리니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인력거 수요가 떨어지면서 인력거꾼들의 수입도 줄게 됐다. 이 때문에 인력거꾼들은 전차가 운행을 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전차가 생긴 지 14년 후인 1912년에는 택시가 등장했다. 이봉래라는 사람이 승용차 2대를 들여와 서울에서 시간제 영업을 한 것이다. 1919년에는 일본인 노무라 겐조가 최초의 택시 회사 경성택시 문을 열었고, 1921년에는 조봉승이 종로택시를 설립했다.

택시비가 쌀 반 가마니 값이나 됐기에 택시는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기생들도 택시를 많이 이용했다. 방송기생이라 하여 당시 처음 생겨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스타 기생들은 으레 택시를 타고 방송국을 다녔다. 요즘의 인기 연예인들과 다를 바 없이 방송에 나와야 인정을 받았고 가치를 높이 쳐주었다. 인력거의 주요 고객이었던 기생들이 택시를 타면서 인력거꾼들이 받던 짭짤한 팁도 택시 운전수들 차지가 되고 말았다.

그랬던 택시가 이제 생존의 귀로에 서 있다. 그 시절 인력거들은 승차거부, 바가지요금, 난폭운전 같은 것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변화에 따라 저절로 사라졌다. 장강(長江)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했다. 새로운 것이 오면 자리를 내어주게 마련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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