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5)
[박관우 칼럼]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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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주역(周易)은 다양성 속에 일정한 질서를 갖고 있는 인식체계이기에 그 해석이 쉽지 않은데 그러한 수수께끼를 푼 책이 정약용(丁若鏞)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주역심전(周易心箋)”이었다.

이러한 주역심전을 저술하는데 있어서 흑산도로 귀양갔던 정약전(丁若銓)의 도움이 컸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손암(巽菴)이 주역심전의 서문을 지었다는 것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사암(俟菴)에게 주역은 단순히 점치는 책이 아닌 백성들이 천명(天命)에 따라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경전이었다는 것이며, 그러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도(道)가 살아 움직이는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암의 그러한 이상적인 생각과 실제 현실의 괴리가 컸다는 점에 사암의 고뇌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흑산도에서 귀양 생활을 하던 손암에게 정학초(丁學樵)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계부(季父)가 되는 사암이 학문의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로 촉망받던 조카라 할 수 있었다.

정학초는 1791년(정조 15) 정약전과 풍산김씨(豊山金氏) 사이에 1남 1녀 중 외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정약용은 직접 지은 묘지명(墓誌銘)에서 정학초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6~7세 때 벌써 글과 사서를 읽을 줄 알아서 그 내용의 잘잘못을 따졌다고 하였으며, 특히 바둑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서 7~8세에 이미 어른이나 노인과 대국해도 강적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그의 바둑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10세에 이르러 학업이 날로 발전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명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경전 읽기를 즐겨하여 시경(詩經),서경(書經),논어(論語),맹자(孟子)를 읽을 때마다 그가 질문한 내용은 바로 답하기가 어려웠으며, 반드시 그가 해석한 것을 들은 뒤에야 이치에 합당한 것을 알았다“

사암이 전하는 정학초의 생애를 통하여 어린 연령에도 학문적인 재능이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학초의 삶에 있어서 운명을 바꾸어 놓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신유박해(辛酉迫害)였는데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부친 정약전을 비롯해 계부 정약용이 유배가게 되면서 정학초도 심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사암은 형제가 화성에서 유배갈 때 전송하러 나온 정학초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가경 신유년 봄에 화란이 일어나 손암 선생은 신지도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로 귀양갔다. 그해 겨울에 다시 체포되었는데 다시 목숨은 살아나 작은 형님은 흑산도로 귀양가고 나는 강진으로 귀양가게 되어 형제가 같은 길을 떠났다.

학초는 땋은 머리로 화성 남쪽 유천의 주막에서 우리를 송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이었다. 집에 오랑캐 나라에서 나는 사안주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은 큰 구렁이의 눈동자이었다. 대체로 이 구슬이 있는 곳에는 뱀이 접근하지 못했고 우연히 뱀과 만날 경우에도 구슬로 비추면 뱀들이 모두 선 채로 죽어 마른 나무처럼 되어 버리니 기이한 보물이었다.

학초가 울면서 그것을 정약전에게 드리면서 ‘흑산도는 숲이 우거져 무서운 뱀들이 많은 곳입니다. 바라건대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몸을 보호하십시오’ 하니 손암 선생이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역시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마침내 서로 헤어졌다.“

이와 같이 정약용이 전송을 나온 정학초의 모습을 전한 내용을 통하여 그가 학문만 탁월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극진하였던 아들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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