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김정은 위원장은 27~28일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 앞서 25일 하노이에 도착해 베트남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25일 방문하게 된다면 대미 승전국이자 사회주의 형제국가인 베트남으로부터 환대를 받는 지도자의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한 뒤 미국과 제재완화와 적대정책 청산을 끌어내는 핵 담판에 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또 산업 시찰로 공산당 1당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 단계적으로 개혁 및 개방 정책을 추진해 신흥시장으로 부상한 베트남의 경험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대로, 북한과 베트남은 1950년 1월 외교 관계를 설립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을 치르고 있었다. 양국을 연결시켰던 반(反)제국주의 의식은 1964년 베트남에 미국이 군사 개입을 본격화한 데 이어 이듬해 한국이 파병을 결정하자, 북한이 북베트남에 군인들과 물자를 보내는 기본적 배경이 됐다. 1964년 베트남에 미국이 군사 개입을 본격화한 데 이어 이듬해에 한국이 파병을 결정하자, 북한은 군인들과 물자를 보낼 정도로 끈끈한 유대를 보였다.

북한은 이와 같은 북베트남 파병을 그동안 쉬쉬해 왔지만 지난해 2월 8일 건군절 열병식에 베트남 파견 공군부대의 대오를 등장시키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전 세계에 공개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북한의 베트남 경제 지원 감소, 통일 정책에 대한 이견 등으로 관계는 다소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중월전쟁 때 북한이 중국 편을 든 것도 관계가 느슨해지는 배경이 됐다. 또 1992년 한국과 베트남 수교, 2005년 베트남 탈북자 대량 한국 송환 등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2007년 호찌민 주석 이후 처음으로 농 득 마잉 총비서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며 전통적인 우호협력관계를 재확인했다. 또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김일성 방문 60주년을 맞은 지난해 11월 베트남을 찾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하노이를 국빈 방문해 응우옌 서기장을 만나면 약 54년 만에 양국 최고 지도자 간 베트남 회담이 성사되는 것이다. 1957년 7월 베트남 국부 호찌민은 평양을, 1958년 11월과 1964년 11월 김일성(당시 내각 수상)은 당시 한창 전쟁 중인 북베트남을 방문했다.

그래서 이번 제2차 북미정상회담의 하노이 고집은 미묘한 역사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하노이 고집은 이번 북미정상회담의 핵심 노림수다. 하노이는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강대국 미국을 물리친 베트남의 수도. 외곽 박장성에 북한군 묘비들이 있다. 베트남전쟁 때 북한은 공군 조종사를 파견했다. 북한은 그런 상징적 기억들을 국제사회에 환기시키고 싶어 한다. 그것은 교묘한 ‘무대 설정(stage setting)’이다. 상징은 실질을 생산한다. 북한은 장소 선정에서 일단 우위를 점했다. 

미국은 다낭을 원했다. 그곳은 관광·산업도시로 베트남에게는 중국의 상해격이다. 베트남의 경제발전 계기는 미국과 화해·수교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전환의 역사성을 부각하려 한다. 그는 장밋빛 미래를 투사한다. “김정은 리더십 아래 북한은 대단한 경제 강국이 될 수 있다. 북한은 경제 로켓!” 하지만 북한의 우선 관심사는 다르다. 그러나 북한의 롤 모델은 파키스탄이다. 그것은 핵보유국으로 경제개발에 나서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경제 제재와 해제·지원을 경험했다. 북한은 언어를 쪼개고 이슈도 나누는 이른바 살라미전술을 선호한다. 핵은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

핵물질·핵탄두, 단·중·장거리 미사일, 핵의 동결·폐기·신고·검증. 그 세계는 북한의 협상 체질과 어울린다. 이번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와 그 주변 자본주의 경제의 눈부신 상전벽해를 보며 북한의 미래 청사진을 머리에 그리며 귀국할 것이다. 부디 하노이가 북한 변화의 출발점이 되기를 고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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