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와 안창호, 차경선이 함께 찍은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9.2.9
김마리아와 안창호, 차경선이 함께 찍은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9.2.9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2.8선언과 3.1운동에 불을 지핀 김마리아 선생이 2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9일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에 따르면,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황해도 광산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계몽운동과 구국활동에 힘쓰던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교사가 돼 교육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대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자 독립의 기틀 마련을 위해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18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이듬해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재일 한인유학생들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2.8독립선언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1919년 2월 8일 김마리아 선생은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했고, 이후 일본경시청에 연행돼 일주일간 취조를 받았다. 김마리아 선생은 도쿄에서의 독립운동 기세를 국내로 확산시키기 위해 2월 17일 현해탄을 건너 조국으로 향했다.

김마리아 선생은 독립선언문을 감춘 채 조국으로 돌아왔고, 거족적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러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후속활동 논의를 위해 서울에 도착했지만 3.1운동 배후 세력으로 지목돼 일경에 체포됐다.

6개월 후 출감한 김마리아 선생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참여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신으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고 이듬해 5월 혹독한 고문으로 병을 얻은 채 출감했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마리아 선생은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에 힘을 보탰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돼 임시정부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1923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여성 독립운동단체 근화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정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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